산골에서는 숲이 제일 먼저 깨어나 부산을 떤다.

언제부터 돌아왔는지 알 수 없는 새들이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오가며 나무를 깨우고, 그 나무까지 합세하여 온 숲을 눈뜨게 한다. 그러고나면 다람쥐와 도마뱀이 졸린 눈으로 씻으러 개울로 가는 소리, 어린 나비의 학교 갈 준비하는 소리로 숲은 또 한 번 들썩인다. 새들의 자명종 소리에도 잠 못 깨는 오두막의 아이들이 산골에서 제일 게으름뱅이다.

   
식목일이 마침 연휴라 서울에서 언니들 네 명과 조카 둘 그리고 병든 엄마와 큰형부가 오셨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지만 산골아이들에게 흘렸다가 만에 하나 못 내려오게 되면 아이들이 상심할 것을 걱정하여 도착 당일 아침까지도 말을 아꼈었다.

연휴라 많은 시간을 벚꽃 뿌리듯 길에 뿌리고 도착한 시간이 새벽. 낮에 선우와 주현이를 미리 잠을 재워두었다. 형들은 오면서 차에서 잤을테니 보조를 맞추어 놓아야 ‘어제의 용사들’이 산골에 모여 밤새 놀 수 있을 거라는 산골아낙의 현명한 판단에서...

그리 했으니 어찌 되었겠는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달밤에 캠프화이어를 한다고 야단이고, 어른들은 어른대로 새벽 5시가 되어도 잘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농사철도 아닌데 올 들어 처음으로 참을 해먹어야 했다.

내 참, 놀면서 참을 먹기는 처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딸 다섯이 다 모였다. 오두막에. 산골사는 막내 동생 반찬 걱정한다고 장을 다 봐서는 식사당번까지 정해서 내려온 것이다. 물론 초보농사꾼이 좋아서 넘어가는 병천순대는 어찌 안빠뜨리고...

그리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떠나가는 날. 차에 오르는 서울 식구들을 보자 선우는 눈물을 흘리고, 속 깊은 주현이는 슬픔을 참으며 잘 가라고 손을 흔든다. 선우의 모습에 언니들이 다 내려 선우를 토닥이며 혼성으로 운다. 언니들은 안그래도 산골에 동생 식구들을 두고 가는 것이 가슴 메이는 일인데, 선우까지 울먹이니 더 괴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선우 걱정은 말고 어여 가라고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는 떠나고 헤어짐의 여운은 차 뒷바퀴에 매달려 가고...
언니 차에서 눈을 뗀 후, 선우에게 어떤 말을 하려다 그냥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 만에 밖을 내다보니 선우가 자전거를 탄다. 그 넓은 논을 몇 바퀴 돌았을까. 조금 후에 다시 내다보니 자전거는 서있는데 아이가 안 보인다.

마당에 나가 자세히 내다보니 차 안에 앉아있다. 지 좋아하는 테이프가 거기 있으니 아마 그 음악을 들으며 슬픔을 삭이는 모양이다. 내버려 두었다. 차 뒤로 형들과 축구하다 간 공은 그대로 있는데...

도시에서 같았으면 선우를 안고 그만 울라며 다독여주고 얼러주고 했겠지만 산골에서는 되도록이면 스스로 삭히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슬픔도 삭히는 방법이 있고, 화도 삭히는 방법이 있음을 스스로 알아내도록 말이다. 안그래도 요즘 애들이 슬픈 것도 못참고, 배고픈 것도 못참고, 화나는 일은 더욱 못참고, 추운 것, 더운 것도 못참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배고프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에 들이대고, 아니 배고프기도 전에 들이댄다나?

화나 있으면 풀어주느라 별짓을 다하다보니 스스로 화를 참고, 삭힐줄도 모른단다. 춥거나 더우면 죽는줄 알고 에어컨, 보일러를 틀어재끼고... 슬픈 일을 겪으면 정서에 문제 생긴다고 달래고 얼르고 한다나... 어쩜 나도 그 대열에 앞장섰을 것이다. 귀농 전에는...

차 안에 있었던 선우가 오두막으로 들어온 것은 한참 후다. 선우를 안나주며 말했다. "선우야, 사람은 말이다, 살다보면 슬픈 일을 많이 겪게 돼. 오늘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죽기도 하고, 중요한 시험을 보았는데 떨어지기도 하고, 사랑하는 개가 죽기도 하고,.. 어른이 되면 더 많은 슬픔을 감수해야 한단다."

"알아요" 아직까지는 퉁명스럽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점은 그 슬픔을 어떻게 가라앉히느냐에 있다. 스스로 좋아하는 일에 빠지던지, 아니면 땀을 내며 열심히 일을 하면서 잊으려 하던지... 그런데 오늘 우리 선우는 너무 훌륭하게 슬픔을 극복하던데? 너, 자전거 타다 말고, 아빠 차에서 음악 들었지?"
"네 , 그랬어요."
"그래, 그러니 조금 마음이 낫지 않니?"
"네, 슬픈 게 조금 풀리는 것 같았어요."

그리 슬프면 서울 가서 예전처럼 살자니 그건 절대로 싫단다. 산골이 싫어서가 아니라 형들과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그런단다. 뻔히 아는 일이지만 그래도 한 번 확인해보고 싶은 에미는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선우와 대화를 계속한다. 엄마도 언니들과 헤어져 서럽지만 스스로 삭히느라 책을 보았노라고 했다. 선우의 마음을 에미가 알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니 나중에는 선우가 밝게 웃는다.

포리스터 카터가 지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보면 충직한 개가 죽자 인디언 할아버지는 일찍 부모를 잃은 다섯 살 된 손자에게 말한다. “사랑했던 것을 잃었을 때는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한 마음이 든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뿐이지만, 그렇게 되면 항상 텅 빈 것 같은 느낌 속에 살아야 하는데 그건 더 나쁘다”고....

인디언 할아버지처럼 멋진 설명을 해주고 싶었는데 에미의 말주변만으로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또 초보농사꾼이 가만 있을 사람인가.

일전에 사온 옛날 항아리가 새는지 호스를 연결하여 물을 담아보자고 선우에게 바람을 넣으니 선우는 신이 나서 공구를 챙긴다. 호스가 짧아 두 개를 연결해야 한다고 일거리를 주자 자기가 연장 담당이라며 검은 비닐에 주섬주섬 되는 공구인지, 안되는 공구인지도 모르면서 잔뜩 챙겨서는 누렁이쪽으로 올라가는 선우의 어깨가 더욱 넓어 보인다.

오늘 밤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을 자빠지게 읽어주어야겠다.
 

저작권자 © 울진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