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서는 굳이 달력으로 때를 가리지 않아도 된다. 자연에서 소리 없이 보여 주는 것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활자화된 달력은 알아서 멀리 비켜나 있다.

그렇기에 도시에서보다 침묵이 더 가치를 발하는 곳이 산골이다. 차분히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자연이 일러 주는 것들에 나를 내어맡기면 시시콜콜하게 떠오르는 잡념 따위는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로 날려 보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아궁이의 재를 말끔히 쳐내듯 세상 것에 더러워진 눈과 귀를 말끔히 비워두어야 한다. 지금은 송홧가루 날리고, 개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으니 산골에서는 고추와 야콘을 심어야 한다.
인디언 위네바고족은 5월을 옥수수 김매주는 달이라 했고, 수우족은 말이 털갈이 하는 달이라고 했다. 이보다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그러니 5월이라 송홧가루 날리고 개복숭아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그리 돌아가니 5월이다.


   
한 달 전의 일이다. 어린이날 맞이해 서울의 맘씨 좋은 분이 우리 학교 아이들을 서울 구경을 시켜 준다는 말을 했다. 어느 분이 좋은 일 하시는구나 했다. 아직 어린이날이 멀었고 곧 안내문이 오겠지 하는 마음에서... 아이들은 시간만 나면 서울이야기를 했다. 3박 4일로 간단다, 청와대에서 노대통령도 만난단다, 63빌딩도 간단다 등등. 점점 서울관심지수는 두릅나무가 하늘을 찌르듯 높아만 갔다.

아이들은 서울의 이모와 사촌 오빠에게 연락하여 63빌딩으로 오라는 둥 벌써 마음은 서울에서 1박을 하고 있었다. 주현이는 서울갈 때 용돈으로 쓴다고 에미, 애비에게 커피 알바를 해서 100원씩 받아 저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이날이 코앞에 얼쩡거리도록 안내문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우, 주현이가 서울 못가게 되었다고  울먹이며 들어와 가방을 힘없이 놓는다. 이제 커피 알바할 일도 없고, 저금통도 필요 없게 되었다며 치워 버린다.

너무 놀라 묻는 에미에게 "경기가 안 좋아 그리되었데요" 한다. 이건 아이들에게 너무 큰 실망이었다. 나까지 맥이 빠져 선생님께 전화를 하여 사정을 물어보았다.

서울의 은행연합회라는 곳에서 전화가 왔더란다. 이번에 삼근초등학교 아이들을 서울나들이 시켜주기로 하였으니 분교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오라고 했단다. 그런데 5월이 다가오도록 연락이 없어 교육 일정도 잡아야겠기에 전화를 하니 취소되었다고 했단다.
그게 전부다. 더도 덜도 없이 그게 전부다.

선생님들은 아이들 충격을 줄여 주기 위해 경기 운운을 했던 것이고... 선생님이 죄인인 것처럼 아이들에게, 부모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해야 하는지...
3박4일 서울을 가야 하기 때문에 교육일정상 이어서 오지 산골아이들을 위해 순회공연을 오겠다는 연극도 취소했다고 했다. 부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산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리 전화하여 사정얘기를 한 것이 아니고 그저 취소되면 그만인 거다. 서울 같았으면 아이들 사기, 꿈 운운해가며 학부모들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도 알아서 기었을 것이고...

오지 산골아이들이니 적선하듯 보내주려다 사정이 생기자  연락도 없고... 연락이 없으면 못가는줄 알면 그 뿐.
우리 아이들은 그렇다고 치자. 어차피 귀농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방학 때, 명절 때 많은 날을 서울에서 보내고 해외여행도 다니고 하니 말이다. 그런 우리 아이들의 실망이 이 정도인데 이곳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의 충격은 어떠했겠는가? 그것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다는 어린이날에...

사람이 결과만 놓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과정도 중요한 경우가 많음을 안다. 요즘 일부 단체 등에서 그런 행사를 하면 `전시용'인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는데 그리 된 꼴이 되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정으로 일정이 바뀌었으면 사전에 미리 연락하여 아이들에게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했어야 옳았다. 보내주면 감지덕지하게 생각하고, 연락이 없으면 못가는줄 알아야 하는 산골아이들. 어른들의 그 삐뚤어진 생각 때문에 산골아이들의 꿈은 목련꽃 짓뭉게지듯 무참히 짓밟힌 것이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는 5월이 이리 흐르고 있다.


밤에 마당에 섰다.
어른인 것이 이리도 부담스러울 수가 없다. 산골에 몸담고 사는 것이 귀농하고 처음으로 구차스럽게 느껴지는 날이다.

오늘따라 달과 별이 날 위로한답시고 내 주위로 모여들지만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산골에 왔으니 오지 산골아이들에게 이런 실망을 재탕하지 않기 위해서는 산골에서의 삶에 심지를 깊게 박아야 한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하는 그런 씁쓸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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