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8월이 코앞에서 알짱거린다.

산골의 여름은 사람 잡는줄 알았는데 여름다운 모습 한 번 못보고 입추를 맞이할 판이다.
햇빛 구경하기 힘드니 작물이든 사람이든 곰팡이가 안나고 배기겠는가. 햇살 가득한 날은 서로 달려 나가 제 몸에 핀 곰팡이를 말릴 일이다.

며칠 동안 산골이 북적북적했다.
서울의 경희대 노래동아리 학생 여섯 명이 농활을 왔다.

   
며칠 전 조카가 이모부 도와드린다고 힘들게 일하고 가면서 “농활 오겠다”는 말을 흘리고 갔었다. 학생들이 도착하기 전, 초보농사꾼은 예전 실력을 발휘하여 집을 두 동 뚝딱 지어놓고 야외의자 세트까지 가져다 놓으니 손색이 없단다.

학생들과 사흘 동안은 고추밭을, 이틀은 야콘밭의 김을 맸다.
생전 안하던 김매기를 계속하니 종목을 제발 바꿔달란다. 그래? 뭐 어렵겠는가.

그럼 퇴비를 뿌리라고 했더니 좋아한다.
"이모부님, 얼마나요?''
"얼마 안돼. 두 차''
"......''

여학생들은 고추줄을 묶어주는 일을 하니 허리가 동강날 지경이겠지.
허리 아프고, 어깨 아프고... 온 삭신이 쑤셨겠지만 떨떠름한 인상 한 번 안하고 서로 위로하고 농담해 가며 잘 해낸다.

김매기 다 하고 그 너른 밭에 퇴비 다 뿌리고, 고추줄도 튼튼히 묶어주고, 한방영양제까지 뿌려 주었으니 우리 고추 기분이 째졌을 것이다.
학생들은 산골에 신세지지 않겠다고 하루 계획표와 식단까지 야무지게 짜왔다. 장도 봐오고... 그 계획표를 본 초보농사꾼

"그런데 아가들아, 점심 먹고 1시간 낮잠이라고 되어 있는데 누구 맘대로 낮잠잔다고? 야무진 아가들....''
아침은 오두막에서 먹고 , 저녁은 학생들이 산골가족을 초대해 텐트 앞에서 달빛 아래 저녁을 먹었다.

그러고 나면 노래동아리답게 기타 치며 한판 뽑아내는 노래, 거기에 달려 나오는 젊음.
젊음이란 눈부시게 화려하고, 푸성귀처럼 싱그럽고, 돌나물처럼 맹렬하고 꼭 그만큼 고독한 것.

세월밥을 먹을수록 진하게 고독할 일도, 눈부시게 화려한 일도 없으니 나이 든다는 것은 그게 고질이다.
산골아이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누가 농활 온 학생인지 모를 정도로 밥하고 심부름하기 바쁜 산골아가들. 애비 잘 만나(?) 귀농하여 이런 경험도 해보고...

그리 밤이 깊어가듯 인연의 강도 깊어만 갔다. 그래도 이모부 왕따 안시켜 주고 잘 놀아주니(누가 누구의 수준에 맞는건지...) 고마운 일이다.
그리 고생해서 일 다 끝내고 마지막 날은 초보농사꾼이 불영계곡으로, 바다로, 소광리로 데리고 다니며 `하루 추억만들기'를 제작해 주었다.

불영계곡이 거친 남성의 야성미를 느낄 수 있다면, 소광리는 섬세한 여성의 품같이 아기자기하고 따사로운 곳. 그리고 탁 트인 바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끌어안고 있는 울진이 난 좋다.


하루를 멋지게 보낸 농활학생들이 새벽기차타고 갈 시간이다.
기차시간까지 피아노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새로운 인연들... 아쉽다는 말을 노래에 섞어 토해낸다.

기차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창섭이가 묻는다.
"이모님, 또 와도 돼요?''
"살다보면 정말 어디론가 뜨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거다. 그럴 때 훌쩍 떠나오렴. 그리고 이모, 이모부도 특별한 뜻이 있어 귀농했으니 최선을 다 할거야. 우리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신분답게 최선을 다하며 살자.''
"네...''

새벽의 분천역은 끈끈한 인연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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