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말을 아끼고 싶다. 그것은 내실을 기하자는 의지에서이다.
말이 많으면 그 안은 비어있는 법. 가을에 속까지 비어보라. 그 허망함을 어찌 견뎌내는지...


추석이 내일이라 서울에 가야 하는데 급한 일들이 너무 산골에 널려 있어 통제가 안된다. 아침부터 비가 오니 일이 더 더디다. 아이들을 집에 두고 밭으로, 들로 다니며 산골 비울 준비를 한다. 이사 와서부터 지금까지 오두막을 잠그고 다닌 적이 없다. 잠그는 것도 만들지 않았으니 서울에 며칠 묵든 어떻든 그저 편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두고 사람만 옮겨 다녔다. 그런데 고추말린 것을 하우스에 두고 가려니 이웃이 더 말렸다. 컨테이너에 다 옮겨 놓고 잠그고 가라는 것이다. 이런 때 농작물을 제일 많이 도둑맞는다나...

   
일년 내 고생한 생각을 하니 그리해야 할 것 같아 그리하기로 했다. 그 많은 것을 다 옮기고 나니 진이 다 빠져 “서울까지 갈 수나 있을까” 싶다. 오후 4시에 네 식구 모드 트럭에 올랐다. 아이들은 형들 본다고 들뜬 마음에 엉성한 트럭을 찌르지만 산골 부부는 두 눈만 껌벅일 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올라가는 길에는 산골만큼이나 예쁘게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난 가을을 좋아하면서도 가을앓이를 어김없이 한다. 산골에 와서는 달라지겠지 싶었다. 추수때와 겹치니 그럴 여유가 있을라고 싶어. 그러나 산골이라고 무시할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깔깔한 바람에 살갗이 반응을 하며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유학가고 싶은 가슴 속 응어리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와 감당 못하기는 매한가지고...

결국 말수가 적어지고 웃음을 아끼게 되는 가을병이 도진 것이다. 산골에서도. 그러다 어쨋든 서울나들이를 하게 되었으니 오가는 바람에 마음을 헹구어내리라는 기대가 등을 간지럽혔다. 늘어놓은 일들을 뒤로 하고 산골을 과감히 떴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가을나무에 눈길을 주다가 옆 승용차 안의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마냥 얼른 머리를 돌리게 되는 거였다. 내가...

그러기를 몇 번 하다보니 옆을 보기가 싫었다. 가슴도 쓸쓸해지고...
귀농 후 수없이 서울을 오가면서도 이리 민감하지는 않았는데 하고 마음을 쓸어내리려 하면 할수록 더 질기게 오감을 자극했다. 난 여행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휴게소에 잠시 들러 커피마시는 그 여유가 좋아서이다. 그러나 이번 추석에는 휴게소에 들리는 것이 좋지만은 않았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트럭이다 보니 트렁크에 넣을 짐을 차 안에 다 넣고 가야 한다. 혹여 비가 올까봐. 그러니 발아래에까지 짐이 차지할 수밖에. 신발도 벗어서 한 쪽에 찔러 넣고 짐 위에 발 올려 놓고 오가는 것이 이제는 상식처럼 되었다. 그런데 휴게소에 예전처럼 차 한 잔 마시기 위해 들러보라.

우선 짐 속에서 신발을 찾아 문을 열고 밖으로 던진 다음 내려서서 신어야 한다. 6인이 타는 포터 더블캡인데도 아이들이 크다보니 장거리 운행 때는 뒷좌석에 서로 자기 위해 싸움이 잦았다. 결국 생각해 낸 것이 뒷좌석에는 딸아이가 자고 발 놓는 곳에 돗자리를 깔고 큰놈이 누워 잔다. 물론 신발은 다 벗어 돗자리 밑에 넣고. 그러니 내 신 던져 신으랴, 뒷자리의 아이들 신발 찾아주랴, 벌써 기분은 번데기처럼 구겨져 버리고 만다. 예전에 서울 오갈 때에는 그래도 덤덤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본가와 친정에서 산골에 필요할 거라며 주시는 짐을 실었는데 모습이 가관이었다. 한쪽에는 각목과 PVC파이프 등을 실었고 한쪽에는 의자, 책상, 바구니 등을 실었는데 거의 망한 집 이삿짐 같았다. 사이사이로 찔러 실은 자루들은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쓸쓸해 보였다.

산골로 향하는데 다 내 트럭만 쳐다보는 것 같아 또 마음이 쓰였다. 거기까지도 좋았다.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려는데 톨게이트 직원이 밖에 서 있다가 우리 게이트를 막고는 자동표를 자기가 뽑아들고 주지 않았다. 20대로 보이는 새파란 직원이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한동안을 그러고 있는 거였다.

화를 참으며 하늘을 보고 있는데 퉁명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짐을 이렇게 실으면 어떻게 합니까? 덮개를 씌워서 정리한 다음 다녀야지, 짐이 이게 뭡니까?” 가을은 산골에 어울리게 정리되어가는 가치관도 뒤흔들어 놓을 만큼이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추석이 다가오니 2년 전 일이 생각나 그 때 써두었던 글을 올려보았다. 세월이 그리 흘렀는데 자연 속에서 그들의 물에 끼이려고 그리도 발작을 했건만 내게 변화된 모습이 있는지...

그 후 더블캡은 세레스와 갤로퍼 중고로 바뀌었다. 며칠 전에 세레스를 타고 서울에 갔었다. 여전히 휴게소에 들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두리번거림도 여전했다.
달라진 것은 트럭이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당당하지 못함이 분통터졌다. 귀농하고 많은 면에서의 변화가 있었고, 그 중 당당함이 그 변화에 큰 몫을 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아직 내 성에 차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 나의 모습에,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가을이라 더 예민한 반응을 했으리라 믿고 싶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2년 전의 내 모습과 이번 추석 트럭타고 휴게소 들렀을 때의 모습이 어떨지 내가 내 자신에게 미리 물어보고 싶다. 아무렇지도 않은지...
러시아의 속담에 바다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전쟁터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다. 나는 열 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가을을 맞이하고 싶다.
가을은 자신을 안으로 안으로 살펴봐야 하는 계절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기에 무엇을 향해 한 걸음을 떼고 있는지, 산골에서 어떤 모습이 “산골다운” 모습인지를 끊임없이 들춰내야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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