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손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봉숭아물을 보며 초승달을 떠올리는 여자는 행복하다. 벌건 대낮에 홀랑 벗고 마사지실에 누워 손톱까지 마사지하는 것도 모자라 예술 운운하며 손톱에 덕지덕지 발랐다 지웠다를 일과로 생각하는 여자들에 비하면...

가끔 송사리, 모래무지, 피라미 등의 단어들이 아련히 머리에서 가물거릴 때 손에 든 호미를 놓으며 피식 미소 한 번 지을 수 있는 여자는 행복하다.
뻑하면 강남의 어느 집 게요리가 끝내준다더라, 어느 명품점에 죽이는 구두가 들어왔다더라를 뱉으며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간 여자에 비하면...

새끼줄에 소중히 꿰어있는 고등어를 사들고 오셨을 때의 아버지의 힘들어간 어깨처럼 말이다.

세상사는 거야 거기서 거기지만, 마음의 우물에서 퍼내는 물의 향기는 서로가 다름을 산골에 박혀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 집에는 개가 아홉 마리가 된다. 개띠 주현이가 자빠지게 좋아하는 개들이 말이다.
덩치 좋고, 허우대 멀쩡한 놈이 그리 많은데도 개 본연의 구실을 하는 놈은 누렁이 뿐이다. 작은 소리에 민감한 것도 누렁이고, 저 비포장 길 입구에서 검은 물체만 나타나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놈도 누렁이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나면 난 서둘러 저녁밥을 먹는 버릇이 생겼다. 그저 떠난 자의 흔적도 수습해야 하고, 손님으로 인해 눈에서 비껴 있던 산골아이들도 눈에 넣어야 하는 등 안으로 안으로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은 저녁을 서둘러 먹었다. 그런데 저도 주인을 닮아 안으로 할 일이 많은지 누렁이가 자꾸 짖어댄다. 값나가는 멜라뮤트는 무엇을 지키는 일에는 젬병이다. 그러나 누렁이는 어리버리한 주인장과는 달리 예민하여 송이산도 잘 지킨다.

가을에는 그 레이더에 먼지 낄 날이 없다. 앞산은 우리 송이산이고, 오두막 뒷쪽은 이웃집 송이산이다. 그 중간쯤에 “레이더”가 기거하는 집이 있으니 왜 안그렇겠는가.
누렁이가 자주 두 송이산에 대고 목놓아 사태를 보고해도 산골주인장 별반 반응이 없다. 사실 송이철에는 송이도둑이 많다. 간혹 마을에 내려가 보면 어느 산에서 도둑이 잡혔다느니, 합의를 봤다느니, 수갑을 찼다느니 하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런데 이 밤에?? 사실 송이도둑은 밤낮 안가린다더만... 산골가족은 “그런가보다 가족”. 뭐 입에 잔뜩 겨울양식을 물어 나르느라 바쁜 다람쥐라도 걸리적거리는가 보다 했다. 그러나 비온 후 개울물 불어나듯 점점 더 사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초보농사꾼도 무얼 마시다(무얼 마시는지, 푸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밖으로 나가보지만 짖음은 계속되고...
순간... 혹시?? 세 박씨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어쩜 그리 박자가 맞는지. 물론 큰 박씨는 무얼 푸는 중이라 눈빛이 기하급수적으로 흐려가는 중이지만 귀는 안그런가보다.
멧돼지가 내려온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박씨 일가. 내가 생각해도 그 확률이 맞을 것 같았지만 호기심 많은 박씨 일가의 장단에 맞추기 싫어 잠자코 있었다.

지난 8월에도 멧돼지가 내려와 고구마와 야콘을 벌집 쑤셔놓듯하고 간 일이 있었다. 그 때를 동시다발적으로 상상했는지 곧바로 출동 자세를 취하는 박씨들.
호기심 면에서는 한 발 쳐지는지 , 애비와 오래비보다 철이 들었는지 주현이는 나서지 않겠다고 한 발 물러선다.

역시 한 호기심하는 선우와 초보농사꾼. 옷을 입고, 손전등 들고, 뭐 괭이를 든다나 어쩐다나... 곧 생포할 것처럼 나가면서 요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부자가 상의한다. 거기까지 좋았는데 초보농사꾼 바짝 바람이 들어간 아이들에게 종이와 연필을 가져오란다. 자기가 무슨 서산대사라고 종이와 연필로 멧돼지를???

   
관심 없는 척하고 있던 난 궁금증이 발동. 문을 열고 나가보니 선우가 무엇인가 읊조린다.
유언장?? 애비가 읊고 주현이가 받아쓴 것이라나??
저러고 싶을까. 아무리 눈높이 교육이 중요하다지만 이건 눈높이가 맞는 것이 아니라 철높이가 맞는 것 같다. 선우는 애비의 유서를 재미있다는 듯 읽어나가더니 두 놈이 또 누군가.
그 애비에 그 핏줄... 한 술 더 떠 지 애비더러 거기에 사인을 하란다. 죽이 맞는다.
두 남자가 어둠 속으로 출동하는 순간, 주현이는 잔뜩 겁을 먹은 눈치. 아직 철이 없으니 철없는 애비와 오래비를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 두 박씨가 어둠을 뚫고 호수밭으로 출동하고 한참이 지나도 개짖는 소리만 요란할 뿐 두 박씨는 나타나지 않는다.

일전에 뉴스에서 보았는데 어느 농가에 굶주린 멧돼지가 내려와 농부에게 달려들어 크게 다쳤다는 내용이 생각나 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올라가볼까? 동네 분들을 불러와야하나?? 기가 막혔다.

간이 잣만해져 가지고 있는데 한참 후에 나타난 두 박씨 호수밭과 부터골은 안전하다며 걱정 말란다. 걱정을 안할 수 있는가. 저리 철없는 사람과 사니...
선우는 그 어두운 곳에서 진지하게 멧돼지를 찾는다고 종횡무진했다는 후문. 나중에 커서 선우가 애비의 유서와 멧돼지 사건을 어떻게 평가할까... 걱정이 앞선다.

"선우야, 주현아, 그래도 에미는 제정신으로 사니 너무 걱정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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