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엔 금낭화가 한창이다.


비 오고, 흐린 날에 관계없이 정을 가득 담은 주머니를 팔에 주렁주렁 달고 나와 앉아있다.
어린놈은 작은 주머니를, 에미는 큰 주머니를...
제 몸에 겨운 짓은 하지 않는다.
꽃에서도 인생을 배우는 산골이다.


   
산골에 와서 안타까운 일 중 하나가 꽃밭이었다.
귀농하여 보니 마당이 아주 아담했다. 전 주인 할아버지는 차가 없으셨기 때문에 그것도 운동장이었으리.

욕심 많은 우린 차가 있으니 마당에서 차를 돌릴 수 없었던 것. 그래서 마당을 넓히기로 했다.
마당을 넓히면서 꽃밭에 생흙을 부었으니 생명체가 살까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해마다 꽃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꽃도 얻어다 심었으나 말짱 꽝이었다. 여간 고민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어릴 때 방학이면 충남 천안의 할머니댁으로 달려갔었다.
할머니 다음으로 반기는 것이 맨드라미, 분꽃, 과꽃, 해바라기, 봉선화. 그리고 키 작은 채송화의 앳된 얼굴이었다.

밤에 할머니 팔에서 빠져나와 오줌 누러 마당으로 가면 왜 그리 무섭던지. 그러나 자연은 품는 습관이 있어서 나를 돌보는 놈이 꼭 있었다.

달빛 아래서 내가 오줌 눌 때까지 보초를 서는 놈들. 어스름 달빛에 보는 꽃밭은 이미 꽃밭이 아니었다. 무서움에 질려있는 어린 소녀의 가슴으로 꽃 그림자가 슬그머니 뒤꿈치 들고 들어오곤 했다.

오줌을 한 번 눌 때마다 어린 소녀의 가슴은 꽃빛으로 물이 들었으리...
소녀가 자라 서울의 회색공간에서 가슴에 저장된 그 꽃물을 야금야금 빨아먹으며 살았으니 그 또한 복이 아닐 수 없었다.

산골아이들에게 그리 해주고 싶은 거다. 어린 내 새끼들에게도....
그들의 신생아 솜털처럼 파리한 가슴에 꽃물을 유산으로 가슴에 쥐어주고 싶은 거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놈의 꽃밭은 질기게 인내력 테스트를 시켰다.
그리 귀농 햇수만큼 줄다리기를 하다보니 몇 포기 얻어 심은 생명력 강한 원추리꽃이 새끼들을 데리고 꽃밭을 점령해 버렸다.

결국 나쁜 머리 써서 생각한 것이 `포기나누기' 일명 `자선베풀기'.
원추리 싹들이 모여 있는 곳을 삽으로 떠보니 그 안에 새끼 토란만한 것들이 머리카락 얽히듯 얼기설기 꼬여 있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떼어 다른 장소에 옮겨 심었다.

집 앞에 심은 붓꽃도 오늘따라 빼곡해 보이기에 삽으로 떠보았다. 그 놈들도 서로 몸이 얽혀있기는 마찬가지.
서로의 발목을 잡아 너도 못 크고, 나도 못 크다 보니 새순이 얽힌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람의 이치도 마찬가지리. 서로 돕고, 양보하고 살면 서로 성공할 수 있는데, 서로 얽혀서 헐뜯다 보면 너도 못살게 되고, 나도 못살게 되고 마음에 깊은 상처만 남아 소풍길이 얼마나 고달픈가.

원추리꽃과 붓꽃을 하나하나 얽힌 다리를 풀어 새로 만든 꽃밭에 옮겨 심었다. 그리고 금낭화도, 백합도 순서대로 제 몸을 나누는 의식을 성스럽게 치렀다. 여지껏 그저 사다 심고, 얻어다 심을 줄만 알았지 내 안의 것을 나누어 심을 생각은 못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진리를 오늘 원추리꽃과 붓꽃의 포기나누기를 하며 깨달았다. 자연은 그리 내게 말을 건다.

큰소리를 내지 않고, 사람처럼 목에 힘도 주지 않고 아기들 옹알이 하듯 들릴듯 말듯 내게 말을 건다. 어여 알아 들어야 하건만, 귓고래에 욕심이 더껭이가 져 알아듣지 못한다.
이리 제 몸을 나눈 놈들은 저만 자라는 것이 아니고, 자식을 낳고 낳아서 나누어준 것보다 더 풍성해지겠지. 새 집으로 이사 온 놈들이 처음에는 그리 자리텃을 하더니 지금은 이제 막 물에서 헹구어낸 것처럼 해맑다.


삶도 그렇다. 밖으로, 밖으로 내어주다 보면 내 안의 것도 새끼를 쳐서 더 풍성해지는 것을...
이 햇살 따사로운 날 난 무엇을 나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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