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의 밤에 마지막으로 챙기는 일이 요강이다.
요강을 비우기 위해 마당에 서면 머리위가 궁금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추위에도 산골가족을 위해 일찌감치 밥을 해먹은 달과 별들이 식솔들을 거느리고 죽 나와 앉아있다.
그 날카로운 모서리는 바람만 스쳐도 곧 얼어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
그런 산골친구들이 있어 오두막의 밤은 따사롭다.

사람은 같은 것이라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바가 각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자기의 느낌을 상대방의 가슴에 내리꽂으려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그 중 하나가 뻐꾸기 소리가 아닐런지.
뻐꾸기 소리를 듣고 발장단이나 손장단을 맞추는 사람이 있을까.
뻐꾸기 소리는 신체 외부의 것과 장단을 맞추는 울림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영혼에 파장을 주는 소리다.

누가 들어도 , 언제, 어느 때 , 요즘 버전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어도 늘 영혼을 푸근하게 하기 때문에 질리지 않는다.
질리기는커녕 괜시리 가슴이 내려앉고 아무리 기분이 업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금새 깊은 묵상의 샘에 빠지게 하는 마력을 지닌 소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새이면서 모내기 철에 어김없이 찾아와 장단을 맞추는 홀딱벗고 새는 어떤가.

그 역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어도 늘 경박스럽다.
그래서 그 소리는 신체 외부의 것과 장단이 맞는다. 그의 소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체 부위는 머리지 싶다. 밭이나 논에서 일하다가도 머리를 까딱이기 바쁘다.
산골의 모내기는 홀딱벗고 새가 반을 담당한다.

이렇게 새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지만 사실 난 새이름에 까막눈이다.
뭐는 까막눈이 아닐까마는...
뭐, 안다고 해봤자 뻐꾸기, 뜸부기, 참새, 박새, 까치, 딱따구리 정도가 고작이다.
그렇다고 살아가는 데는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 팔자도 참, 그것이 갑자기 사는데 불편하게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몸뚱아리를 산골로 옮기고 보니 새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이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다.
산골 오두막의 문은 다 창호문이다.
달랑 종이 한 장이 안과 밖을 구분짓는 유일한 막이이다.
그 창호문으로 아침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모닝콜을 해주는 그들이 여간 고맙지 않다.

귀농 전에는 무슨 고막터지는 따발총같은 소리로 잠을 깨다 보니 일상이 꼭 전쟁터같고 그리 살벌했는가 보다.
그러나 산골에서는 나의 부지런한 친구들이 산골가족을 깨워준다.
비록 악보는 없지만 거기에는 가사도 있고, 후렴도 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맑고 신선한 리듬을 듣고 깨다 보니 영혼의 덕깽이도 귀밥 떨어지듯 조금씩 떨어져 나의 일상을 한결 맑고 부드럽게 해준다.

이 바쁜 세상에 뻐꾸기가 어떻고 모닝콜이 어떻고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한다고 하겠지만 은혜를 입었으면 갚을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새들이 떠나간 오두막에서 겨우내 그들의 이름을 열심히 익혀 따뜻한 봄날 그들이 찾아들었을 때, 이름을 불러주며 아는체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뒷간에 앉아 있는데 어디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귀에 꽂힌다.
이 추운 날 무슨 소릴까.
머리를 들어보니 뒷간 바로 앞에 버티고 서있는 오동나무에 어린 새가 와서 딱딱거리며 쪼고 있다.
내가 아는 전재산을 동원해 본즉, 딱따구리가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혼자 내리는 결론이라 그것이 정확한지는 나도 모른다.
오두막으로 서둘러 돌아와 카메라를 들고 냅다 가보니 벌써 자리를 뜨고 없다.
“넌, 봄에 이름불러 주긴 틀렸다”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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