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선의 발로쓰는 마을誌 -3

“물맛좋고 신선이 놀던 마을”-선미

외선미 2리는 1420년(조선조 세종 4년)경에 배씨(裵氏)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 산수가 수려하며 신선이 놀던 계곡이라 하여 ‘선계(仙溪)’라 칭하다가 1456년 경에 일월산 스님이 이 마을을 왕래하면서 ‘금장산 청수녹수를 마시고 물맛이 신선하다’고 하여 선미라(仙味) 이름하였다 한다.

외선미 2리의 속명은 ‘원마’이다. 마을에 원님이 묵어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나, 조선조에 ‘평해-영양’ 간 한길(큰길)이 이 마을을 통해 ‘구주령’으로 이어졌는데, 당시 이 마을의 서쪽에 ‘다시원(多施院)’인 역원(驛院)이 있은데서 유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농업기반공사에서 다시원이 있던 ‘구지골’ 일대에 농업용수 댐을 설치하고 있다.

외선미 2리는 1765년 경에는 강원도 평해군 원서면 선미리(仙味里)로 칭했으며 1912년 경에 원서면 ‘외선미리(外仙味里)’로 개칭했다. 이어 1917년도에 강원도 울진군 온정면 외선미리로 편입된 뒤 1971년도에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외선미2리로 편제됐다.
‘원마’는 흥해 배씨, 평해 손씨, 안동권씨, 평해 황씨 순으로 입향했다고 전한다.

"저 아래동네와 여기는 한 동네라 배씨가 먼저 들어왔어. 터를 제일 먼저 닦았어. 비석은 없지만 먼저 들어온 성씨로 다 인식하고 있어. 그 다음은 경주 이씨, 거의다가 온정에 살고 있어. 이 아래도 3~4집이 있고 선산도 많다고. 이씨들 다음에 평해 손씨, 그 다음은 평해 황씨, 안동 권씨 순이라 (이무원)"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한 성씨로 알려지는 흥해배씨의 후손은 현재 이 마을에 한 명도 거주하지 않으며 마을 입향조와 입향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또 흥해 배씨 다음으로 원마에 입향한 평해 손씨와 안동 권씨, 평해 황씨, 영양남씨들은 1971년도 이전까지 외선미1리와 2리가 같은 행정구역에 속해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외선미 1리인 ‘안마’의 입향시기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마의 경주이씨 입향조는 주손인 이무원의 5대조인 ‘진호(珍護)’이며 묘소는 ‘금정산’에 있다. 김해김씨의 원마의 입향조는 김성호의 고조부인 ‘덕식’이며 묘소는 원당곡의 ‘면호암골’에 있다.

파평윤씨의 입향조는 주손인 윤대성의 고조부인 ‘산선’이며 묘소는 선구2리 부달의 ‘좌편등’에 있다. 평해 손씨의 입향조는 주손인 손석윤(84, 외선미2리 거주)의 조부인 ‘상’이며 묘소는 기성면 ‘정골’에 있다.

밀양박씨의 입향조는 주손인 박춘득의 조부인 ‘도청’이며 묘소는 외선미의 ‘공동묘지’에 있다. 평해손씨의 입향조는 주손인 손세환의 조부인 ‘익술’이며 묘소는 ‘단디밭’에 있다. 용궁전씨의 입향조는 주손인 전경룡의 조부인 ‘상헌’이며 묘소는‘대기재’에 있다. 전주이씨의 입향조는 이태규의 조부인 ‘기종’이며 묘소는 ‘원당골’에 있다.

또 안동권씨의 입향조는 주손인 권숙도의 조부인 ‘재곤’이며 묘소는 평해 월송의 ‘화구 뒷산’에 있으며 밀양박씨의 입향조는 주손인 박춘근의 조부인 ‘상직’이며 묘소는 영양 본신의 ‘서낭골’에 있다. 원마의 또 다른 밀양박씨의 입향조는 주손인 박성학의 부친인 ‘순칠’이며 묘소는 원당곡의 ‘와우등’에 있다. 원마의 춘천박씨 입향조는 박무일(외선미2리 거주)의 부친인 ‘명봉’이며 묘소는 원당곡의 ‘면암골’에 있다.

외선미리의 영양남씨 입향조는 주손인 남호원(69, 서울 거주)의 10대조인 ‘두환’이며 묘소는 ‘원당곡’에 있으며 ‘원마(외선미2리)’에는 남성진(외선미2리 거주)의 부친인 ‘성진’이 원마로 들어왔다.

또 밀양박씨인 박무식(외선미2리 거주)은 부친인 ‘박연숙’이 들어왔으며 묘소는 ‘원후전’에 있다. 김녕김씨 원마의 입향조는 김형달(외선미2리 거주)의 부친인 ‘령권’이며 묘소는 ‘본신’에 있으며 의성김씨의 입향조는 김수완(외선미2리 거주)의 부친인 ‘차성’이며 묘소는 ‘소원수골’에 있다.

또 파평윤씨 원마의 입향조는 윤명천(외선미2리 거주)의 부친인 ‘유곤’이며 묘소는 ‘범호두골’에 있다.

외선미 2리는 온정면의 북서쪽인 구주령(九珠嶺) 길목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합수’를 기점으로 선구2리와 닿아있으며 서쪽은 ‘구주령’을 기점으로 영양군 수비면, 남쪽은 ‘막인재’를 기점으로 선구1리와 접해있다. 또 북쪽으로는 ‘새재’를 기점으로 원남면 ‘길곡’과 경계를 이룬다.

외선미 2리는 과거에 역원(驛院)이었으므로 ‘원마’, ‘원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 앞에는 금장산(金藏山)과 금정산(金井山)에서 발원하는 ‘외선미천’이 동서로 흐르며 선구2리 ‘문곡’을 지나 광품천으로 진입하며 선구1리와 2리로 나가는 입구에 ‘미륵들’이 펼쳐있다.

"마을 서북쪽에 있는 산이 금장산이고 서넘쪽에 있는 산이 금정산인데 모두 금자가 들어가는 곳이래. 그래 이 마을은 옛날부터 물이 좋기로 이름난 곳이래(이무원)"

마을 형국은 ‘배를 대어 놓은 형국’이라 한다. ‘원당골’은 ‘와가매(기와 만드는 집)’가 세 집이 있었으며 고을 원님이 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졌으며, 원당골은 뱀이 골로 나가는 형이라 하여 ‘장사출곡형’이라고 한다.

영양으로 나가는 한길(큰길)인 구주령에는 풍광이 수려한 ‘열 세 바위’가 있다.
적도암(賊盜岩,도적바위), 생망암(生望岩, 잉태를 기원하는 바위로 ‘생산암’이라고도 한다), 선채암(扇採岩, 부채바위), 인장암(印藏岩, 도장바위), 재목암(財木岩, 재목바위), 풍취혈(風吹穴, 바람구멍바위), 비수암(碑竪岩, 비가 선 바위, 비선바위라고도 한다), 문두암(門杜岩, 문이 막힌 바위), 마두암(馬頭岩, 말머리 바위), 연비암(鳶飛岩, 수리가 나는 바위, 수리바위라고 한다), 문천암(門遷岩, 문을 넘어가는 바위, 문넘이 바위라고 한다), 상광암(上廣岩, 위 넓적바위), 하광암(下廣岩, 아래 넓적바위) 등이다.

도둑바위는 도둑이 바위 밑 굴에 살면서 도부꾼들을 위협한데서 비롯됐으며 생망암은 애기를 업고 있는 형국이라 부녀자들이 돌멩이를 얹어서 애기를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부채바위는 부채를 편 모양이고 재목바위는 기둥을 세운 것처럼 곧게 서 있는 형상이다. 인바위는 1592년 선조 임란에 평해 원님이 가족을 동반하여 서울로 상경하면서 주령에 있는 바위에 구멍을 뚫고 직인을 감춰두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말머리바위는 말의 머리 형상이며 문둥바위는 문둥이들이 항상 기거한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문동바위라고도 하는데 아이들이 글을 배운 바위라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문바위라고도 하여 바위에 문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수리바위는 수리새(매)가 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양지망바위와 음지망바위는 봉화불을 올린 바위라고 전한다. 문천바위는 옆에 길이 나 있어 문지방을 넘어가는 형국이어서 붙은 이름이며 풍취혈은 바위 밑에 큰 구멍이 있는데, 이곳에서 시원한 바람이 늘 나오므로 ‘바람바위’라고 불렀다.

비수암은 ‘비선바위’라고 하는데, 큰 자연석 바위에 두 기의 영세불망비가 음각되어 있다. 하나는 ‘군수 권공 준 영세불망비(郡守 權公 晙 永世不忘碑)’이며 ‘가경 임인 정월(嘉慶 任寅 正月)’이라고 각인돼 있다 비의 주인공인 권준은 정조 22년과 순조1년에 평해군수를 역임한 자이나 ‘가경(嘉慶)’ 년호 기간에는 ‘임인년’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비를 음각하는 과정에서 오기한 듯하다. 또 나란히 각인돼 있는 비의 주인공은 헌종 13년에 평해군수를 역임한 ‘신치응(申致膺)’의 영세불망비로서 ‘군수 신공 치응 영세불망비(郡守 申公 致膺 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당시 대로였던 ‘구주령 길’에는 ‘돌 포장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돌 포장길은 원마에서 서쪽 ‘구지골’로 2킬로미터 가량 오르면 협곡의 계곡 길을 따라 돌 포장 길이 이어진다. 포장길은 간혹 단절되기는 했으나 원형이 대체로 잘 남아 있다. 길의 경사면에 장방형의 원석을 놓아 깔았으며 현재 잔존하는 돌 포장 길의 총 길이는 약 1킬로미터 가량이다. 외선미 주민들이 150년 전에 깔았다고 한다.

영양군 본신으로 들어가는 옛길인 ‘구줄령 도부길’은 10리를 약간 웃도는 산길이며 현재 사람들의 발길이 그쳐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이나 숲을 헤치면 옛 길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이 길의 역사와 흔적을 담은 ‘열 세 바위’의 모습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구주령 길로 들어서는 초입에 ‘역원 터’인 ‘다시원지(多施院址)’가 있다. 현재 다시원지는 문화재 시굴조사를 마친 뒤 댐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시굴조사 후 발굴된 유적 일부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다시원지는 외선미천의 상류인 구지골의 천변 산록에 있다. 이 역원지는 2003년 5월에 경북도문화재연구원이 지표조사를 마친 뒤 2004년 10월에 시굴조사를 실시했으며 32×35미터에 걸쳐 5동 이상의 건물 기단과 초석, 담장지 등이 확인됐다.
서낭제사는 15년 전만 해도 외선미 1리와 2리에서 제관을 함께 선출하여 지냈으나 지금은 외선미 1리만 지내고 있다.

외선미 2리의 들은 2개소로, 가장 큰 들은 마을 앞으로 펼쳐진 600두락 규모의 ‘미륵들’과 ‘원당골들’이다. 30여년 전만 해도 밭농사를 주로 하였으나 1992년도에 농지정리하면서 밭이었던 미륵들을 논으로 전환하면서 마을의 경제가 대폭 상승했다 한다. 밭농사를 할 때는 물이 좋지 않고 빈곤하여 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한 과객이 마을 앞을 지나면서 곰방대로 앞산을 가리키면서 ‘이 동네에서 밭이라도 해 먹을 라면 산에 나무가 지펴야한다’라고 예언했는데 그 후 민둥산에 이상하게 산이 지펴서 지금과 같이 울창한 산림으로 되었고 동네가 괜찮게 살았다고 한다.

농업용수를 용이하게 얻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구주령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 가락올보, 둔전보, 장승보, 웃미륵보, 밭다배, 아랫미륵보, 지통보를 만들었다. 보도감은 2명으로 5월에서 9월까지 보를 반반씩 맡아서 물을 대 주었다. 두락전이라 하여 한 평당 20원씩 내서 장비를 준비하거나 경비로 사용하였다. 보가 훼손되거나 무너져도 이는 몽리자들의 책임이었으며 보도감은 물만 대 주는 역할만 하였다. 물을 댈 때에는 가뭄이 가장 심한 논부터 시작하여 순서대로 물을 댄다. 2002년부터 ‘구지골(구주령 계곡)’에 대형 농업용수댐이 건설되고 있다.

담배농사는 1980년대 후반에 그만두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용하였으나 일손부족으로 그만두었다. 밭이 많을 때 가을에는 주로 서숙을 갈았으며 겨울에 보리를 갈아 초여름에 거두었다. 콩은 산지가 아니고 날이 많이 가물었기 때문에 집에서 먹을 정도만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수확물을 도정하는 시설로는 디딜방아, 물레방아를 주로 이용하였다. 디딜방아는 집집마다 있었고 물레방아는 웃마에 1개 있었다. 물레방아는 이성윤, 이무원, 이복만 씨가 공동으로 운영했다. 물레방아로 쌀 10말 찧어서 도장까지 옮겨주면 쌀 1되를 받았는데, 물이 흔한 곳이라 물이 좋을 때는 하루에 30되 정도의 수익을 얻었다고 한다. 이동식 소형 기계방아인 통통방아(발동기 5마력 엔진)는 집 마당에서 빻아주는 것으로 골목길이 좁은 곳으로 이동할 때는 분해해서 짊어지고 다녔다.

마을에서 어린이들의 놀이공간은 김봉년 씨 댁으로 마당이 모래사장처럼 넓어 다칠 일이 없기때문에 많이 놀았다 한다.. 초군들은 주로 원당골과 구주골에서 소를 먹였으며 초군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을 ‘방장’이라 하고 방장 밑으로 ‘원강구’, ‘채찍강구’, ‘끄럭지강구’가 있었다. 방장은 닷새 장날마다 ‘초군취’를 열고 소를 먹이다가 남의 곡식을 먹인 사람에게는 회초리로 벌을 내렸다. 매를 때리는 일은 현장책임자인 원강구가 하였고 끄럭지강구는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부리망(소 입마개)을 끼우는 역할을 담당한다.

해방 전까지 마을에는 열 두집 정도의 주막이 있었다. 원마가 평해에서 영양으로 넘어가는 ‘구주령 한길’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보부상과 바지게꾼들이 많이 통행했다. 특히 평해에서 원마까지 30리 길이어서 평해장에서 미역이나 소금을 매입하여 영양장으로 ‘도부’를 가는 도부꾼들이 원마에서 주로 숙박을 했으며 골패나 투전을 많이 하면서 놀았다. 마을 사람들이 소를 몰고 가다가도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지나가는 상인이 소를 훔쳐 갈 정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했던 지역이라고 한다.

평해와 영양 수비로 도부를 다녔는데 원마에서 수비까지 10리, 평해까지는 30리로 새벽 3~4시경 ‘소까지불’을 켜고 가면 오전 9시경 수비장에 도착할 수 있다 고 한다.
영양 수비일대는 기온이 낮아 감이 잘되지 않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감 도부’를 많이 했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서 국가의 정치, 군사적인 정보나 소식을 급히 전달하는 통신수단으로 울진에서는 7개소의 봉수지가 확인되고 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현재 일부 흔적이 남아있는 기성봉산리의 표산봉수에서 봉화를 올리면 형제봉에서 받아서 구주곡의 양지망바위, 음지망바위로 옮겨져 새갓바위, 일월산을 통해 한양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서당은 6곳이 있었으며 당시 훈장은 이돌석, 박상직, 박맹봉, 윤상만, 윤형록, 정석봉 씨였으며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 대학, 맹자 등을 가르쳤다.
마을에서 4대째 거주하고 있는 이무원씨 가옥은 1959년도에 6칸 반짜리의 초집을 새로 지었으며 새마을사업 때 함석지붕으로 개축했다. 집안에 산을 소유하지 못한 관계로 국유림에서 밤에 몰래 나무를 캐어와 도끼로 다듬어 집을 만들었다. 집을 완성하고 대목에게 쌀 2가마니를 수고비로 주었다 한다.

원마의 복판에 있는 ‘남종호의 가옥’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오래된 고가로 확인된다. 본채는 남향이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여덟칸 겹집에 듬직한 5량가의 지붕가구로 꾸민 팔작기와집이다. 좌측으로 앞열이 중방, 마루2칸, 방으로 배열되었으며 뒷열은 도장, 큰방, 정지 순으로 배열됐다. 큰방과 정지 앞으로 2칸 규모의 마루가 놓여 있으며 정지 뒤로 처마 밑에 돌출하여 만든 2단의 찬장을 설치했다. 본채 앞에는 마구간이 있다.

원마에서 외선미1리인 안마 방향으로 100미터 지점에 ‘비석거리’가 있다. 권숙도 씨의 밭과 최용도 씨의 담장 경계에 3기의 비석이 서 있는데 비는 모두 2-3조각 이상으로 부서진 상태이다. 확인되는 3기의 비문은 ‘군수심공웅무영세불망비(郡守沈公能武永世不忘碑)’와 ‘군수이공종규영세불망비(郡守李公鍾奎永世不忘碑)’, ‘군수겸울도첨사심공의완영세불망비(郡守兼鬱島僉使沈公宜琓永世不忘碑)’이다. 심웅무 평해군수는 동치(同治)4년(고종2년, 1865년)에 재임했으며 이종규 평해군수는 도광(道光)11년(순조31년, 1831년)에 재임했으며 심의완은 광서(光緖)11년(고종22년, 1885년)에 평해군수 겸 울릉도 첨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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