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영계곡에 단풍이 드는구나 싶더니 가을걷이때문에 그 절경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는데 첫눈이 왔다.
눈인지 서리인지 모를 정도로 조심스럽게 내려 앉았다.
거기에 된서리까지 내려 그동안 파릇파릇 울긋불긋 기세등등하던 풀이며 꽃들이 순식간에 삶아놓은 것처럼 풀이 죽어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예상 못했던 일이다.
우리 삶의 끝도 이 된서리처럼 그렇게 갑자기 오겠지...

된서리맞지 않도록 농작물을 신경 바짝 쓰고 관리하듯 나의 삶도 관리대상 1호여야 한다.

   
얼마 전에 박완서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었다.
그 책 어디엔가에 훈도시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 이야기라면 나도 한 마디 거들 수 있다.

할머니는 왜놈들이 '훈도시'를 입었으면서도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더럽고, 예의없는 민족이라 한다며 한탄을 하셨었다.
코흘리개 때 고향 천안을 등지고 한양에서 학교에 다니던 난 방학만 되면 할머니가 계시는 병천으로 내달리곤 했다.
초등학생인 내게 할머니는 애 취급하신 적이 없었다.

어느 여름방학 밤, 바깥 마당에 멍석을 펴고 밤하늘을 보며 그 '훈도시' 얘기를 자주 하셨고, 그 후로도 그 얘기를 하시며 일본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셨었다.

어린 난 '훈도시'가 뭐냐고 단박에 물었고, 할머니는 "온몸을 다 드러내고 불알만 기저귀로 가리고 사는 상것들이 우리더러 무식하다고 하니 망측한 것들..."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그 뿐만이 아니라 " 일본놈들은 약아 빠졌고, 간교하다"며 눈에 삼삼하신 것처럼 어린 것 무릅에 앉혀 놓고 일장 연설을 하셨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어린애 데리고 객쩍은 소리 그만 하라고 하셨지만 이미 기력이 예전만 못하신 할아버지 말씀을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열을 올리셨다.

할머니가 왜놈이라고 하는 일본 사람을 난 그때까지 본적이 없었으면서도 왜놈들이 그것만 가리고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모습을 어떻게든 상상해 보려고 했던 기억만 선명할뿐 할머니가 왜 일본에 대해 그런 감정을 가지셨는지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생산성본부를 다닐 때,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처음으로 일본땅을 밟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 호텔에서 묵었는데 몇 명의 일본사람들이 자신의 동료 이름을 부르며 내 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짧은 일본말로 잘못 찾은 것같다고 했더니 그들은 '조센징, 조센징'하면서 계속 문을 두드리렸고 그것도 모자라 웃고 즐기기까지 했다.
결국은 전화로 호텔관계자를 불러서야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때 난 일본 사람들이 대를 물리며 우리나라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구나 생각했고 팔뚝으로 돋아나는 좁쌀알만한 소름을 진정시키면서 작은 호텔방에서 이를 물었었다.

할머니의 영향때문일까.
난 일본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정신대다.
지들이 불지른 쌈박질에 왜 죄없는 우리나라 처녀, 총각들을 잡아다 못된 짓을 했는지 생각할수록 부화가 치민다.
그러면서도 조센징이라며 비하하는 풍습은 대를 물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정신대나 징용에 대해 다 나와 같은 강도로 두 주먹 불끈쥐는 경우를 그다지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까.
그것은 할머니의 '멍석 위 무릅 교육'탓밖에 달리 이유가 없는 것같다.
할머니의 '멍석 위 '교육'이 아니었으면 난 우리나라와 일본의 그 깊고 아린 역사에 대해 앎이 살얼음같았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지나가는 말 정도의 '반복적 귀동냥'이 얼마나 그 사람의 사고와 가치관을 좌우하는지 이것 하나만으로도 명명백백하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런 정도의 말들이 가을에 낙엽쌓이듯 쌓여 그 아이의 정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오두막에서 생각없이 내뱉는 말들이 선우, 주현이에게는 사고와 가치관을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입을 떼기도 무서워진다.
딸을 보면 그 엄마를 알 수 있다고 한 것도 보고 듣고 자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일깨워 주는 말이지 싶다.

이제 아이들의 머리가 커지다 보니 이것 저것 신경쓰이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나의 흘러가는 말들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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