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옛 선조들은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있는 이름을 붙였다.

마을 이름은 물론 길 이름 재(嶺)이름 등 한결같이 해학적이고 마을의 특징을 살린 의미심장한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많은 부분들이 왜곡되었거나 지형과 전혀 관계없는 이름들로 바뀐 경우가 허다하다..

조선조 말 고종 때인1896년 전국을 13개 도로 나눌 때 울진은 강원도로 속했고 군 소재지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다하여 北面(북면) ,서쪽에 있다하여 西面(서면), 가장 남쪽이라 하여 遠南面(원남면). 조금 가깝다하여 近南面(근남면)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런 이름이 별 의미없이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단번에 알 수 있다.

1914년 3월1일 자로 평해군과 울진군이 합하게 되니 원남면 같은 경우 울진군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평해군 같은 경우는 기성. 평해 ,온정, 후포면 등 그래도 지역특성을 살린 이름들인데 울진군은 동서남북으로 명칭을 지었다.

마을 이름도 잘못 지어진 곳이 많은데 예컨대 근남면 杏谷里(행곡리) 같은 경우는 본래 “쌀구”라고하여 “ 쌀이 나오는 바위” 즉 “天糧岩(천량암)”에서 유래 되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쌀구”라하였고 한문식 표기로 “米庫(미고)”라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쌀구”를 먹는 과일 “살구”로 표기하여 한문으로 살구나무 “杏(행)”字(자)를 써서 행곡리라 하였다.

기성면 척산리도 뒷산이 누에형국이라 “蠶山(잠산)”이라한 것이 “자산”으로 불리우다가 한문으로 표기할 때 “자” “尺(척)”字(자)를 써서 “尺山(척산)”이라 표기하였다고 한다.

기성면 사동리 바닷가 마을도 옛 지명이“西鯨浦(서경포)”이며 원남 오산리도 “원내”라했다. 울진읍내리 남대천 옆 마을도 “玉溪洞(옥계동)”이라 하고 근남 둔산동 옆 포구도 “揮羅浦(휘라포)”라 하였다.

하나 하나 음미해보면 선조들의 지혜로움과 풍류가 물씬 묻어나는 멋진 지명들임에도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많이 변해 버렸다.

온정에서 영양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구슬령”이라한다. 한문으로 표기하면“珠嶺(주령)”인데 언제부턴가 “구주령”으로 팻말을 만들어서 오랜 세월 지나면 구주령으로 정착되어 지지 않겠는가?

평해군의 경우 1914년 近西面(근서면)과 遠西面(원서면)을 합하여 온정면이라 하였는데 그때 “近(근)”字(자)와 “遠(원)”字(자)를 합하여 “근원면”이라 했다면 오늘날 백암온천이 이렇게 이름이 날수 있었을까?

어쨋던 옛 선조들은 이름 하나 하나에도 심각하게 고민하여 지역 특성에 맞도록 지었는데 일제 이후 지명을 마치 숫자를 나열하듯이 동서남북으로 또는 1리 2리 3리 등으로 표기하여 지역 특색을 없애버렸다.

근래 울진군에서는 마을내의 도로나 길에 대한 명칭을 새롭게 정한다고 한다.

물론 여러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정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마인드라고 본다.

비록 말단 직원이라 할지라도 먼 훗날을 내다보며 책임의식을 갖고 길 이름을 짓는데 심사숙고해야 할 줄안다.

오늘 내가 만든 명칭이 우리지역의 역사를 바꾸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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