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령이란 옛 보부상들이 흥부장에서 해산물을 구입하여 봉화의 소천, 영주 등 내륙지방으로 행상을 할 때 넘나들던 열두 고개를 말한다.

보부상이란 보자기 싸서 머리에 이고 다니는 보상(褓商)과 짊어지고 다니는 부상(負商)을 합친 말이다.

보부상의 기원은 신라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처음에는 물물교환 형식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들의 조직은 방대해지고 체계화 되자 정치가들이 이 조직들을 이용하기도 하였고 국가를 위해 일어나기도 하였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크게 협력함으로서 조선 수립과 동시에 이들의 활동이 급속이 활발하여졌는가 하면,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산성에 군량미를 공급하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갇힌 우리 군사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기도 하였고, 1811년 홍경래의 난 때에도 전국의 부상(負商) 천여명이 난을 진압하는데 동원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때에도 강화도에 군량미를 운반하는 책임을 완수한 예도 있었다. 이와 같이 보부상단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정부에서는 1866년 고종 3년에 보부청을 설치하여 전국 보부상단들을 통합하고 정부차원에서 이들을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고종 20년에 혜상공국을 설치하고 부상을 좌단, 보상을 우단이라하여 관리 조직을 체계화하였다.

울진의 십이령은 흥부장에서 봉화까지 가는 과정에서 넘어야하는 열두 고개를 말하는 것으로 길이 멀고 험준하였다. 십이령은 태백산맥의 지맥으로 산악이 높고 구간이 길어 도적이나 맹수들의 습격이 많았다. 그래서 보부상들은 개별 행동은 매우 위험하여 집단적으로 행동하여야 했다.

보부상들은 죽변장이나 흥부장에서 미역, 건어물, 소금, 생선, 젓갈 등의 물건을 구입하여 봉화, 영주, 안동장에 내다 팔고 다시 내륙지방의 생산품인 피륙, 비단, 담배, 곡물 등을 사서 해안 장터에 와서 팔았다.

그들은 흥부장에서 봉화 소천장 방향으로 이동할 때 반드시 재(嶺) 아래에 있는 북면 두천 주막마을에서 1박을 하고 아침 일찍 집단을 이루어 출발했다. 두천(斗川)마을은10~15채의 촌락을 형성하고 주막집이 6개소 막걸리만 파는 집이 1개소가 있었다.

저녁에 숙박할 때면 보부상들끼리 어울려 투전을 하는 패, 술먹는 패, 주막집 여자를 꼬여 장난을 하는 사람 등 다양한 형태를 보였다. 술을 먹다 모자라면 양조집에 가서 술을 훔쳐 먹거나 남의 물건을 안주로 먹어버려 이튿날 아침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 예사로 있었다. 주막집 여인을 꼬여냈다가 남편에게 들켜 혼이 난 사람도 있고 밤새껏 투전을 하다 돈을 몽땅 잃어버려 다시 흥부장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다.

어쨌던 그들은 이런 사연을 남긴 채 아침 일찍 두천 주막거리를 떠나 바릿재를 올라간다. 바릿재란 명칭은 옛날 사람들이 소에다 물건을 바리바리싣고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릿재 입구에는 맑은 내가 흐르고 징검다리를 건너자마자 `내성행상 불망비각'이 있다. 이 비각의 위치는 울진군 북면 두천리 206-1번지로 1890년경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면서 당시 행상군들의 안전한 상행위에 도움을 준 분들에 대한 공덕비이다.

철(鐵)로 만들어진 이 비석은 당시 봉화 내성(乃城)에 살고 있던 그들의 최고 지위격인 접장인 정한조(鄭韓祚)와 반수(班首)인 안동사람 권재만(權在萬)에 대해 그 은공을 기리고자 세웠던 것으로 1995년 6월30일 문화재자료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보부상단들은 불망비를 세우고 왕래할 때는 반드시 술을 한잔씩 드리고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일제후기 일본인들이 전쟁 물자를 공출할 때 빼앗길 뻔한 것을 당시 주민들이 몰래 땅에 파묻었다가 해방 후에 다시 찾아낸 것이다. 이 비각 옆에는 군수 공덕비 1기가 있고 위에는 선녀가 목욕했다는 선녀폭포가 있다. 그리고 폭포 위에는 효자최씨의 비각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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