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은 잔디꽃에 이어 지금은 금낭화가 한창입니다. 팔뚝에 이쁜 주머니를 죽 걸고 나와서는 바람에게 아양을 떱니다.

헤어스타일은 얼굴 양쪽으로 묶은 것도 모자라 위로 틀어 올렸네요. 그러더니 이내 바람과 놀아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니 삐삐 머리를 한 소녀들 같습니다. 멀리서도 소녀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듯하여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네요.

살면서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힘찬 걸음을 내딪기 위한 구령과도 같은 것이지요.

40대 이후 세대라면 이선희라는 가수를 잘 알 것이다. 대학가요제에서 `J에게'로 상을 타면서 화려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오는 노래마다 거의 히트를 치면서 막힘없이 나갔던 가수다. 그 가수 노래 중에 `알고 싶어요'라는 곡이 있다.

가사는 이렇다.

달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 나의 사랑을 믿나요. /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 진정 나를 사랑하나요. /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주세요.

이런 가사를 갖고 있다.

왜 갑자기 오래된 노래를 들먹이냐 하면 이 가사 밑에 그 답을 적어 본다면 각자는 어떤 내용을 적을까... 생각해 보았다.

만약 어느 부부의 메모가 이리 돌아간다면...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니 생각 안하니까 신경 끄셔.) /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행여라도 니가 나타날까 무섭다. 납량특집이 따로 있냐?) /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바삐 돌아가는 피곤한 세상에 지랄했다고 깨서 훌쩍이냐?) /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니 이름 석자만 들어도 `범 본 개 뭐 떨듯' 부들부들 떨리는고만 어디다 적어 적길... /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어쩌다 허구 많은 사람 중에 너를 만났는지 팔자도 우라지게 없는 남자라니깐.) /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뒷 머리카락이라도 생각날까 무섭다. 귀신은 뭐하는지...) /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그 놈의 콩깍지가 훌러덩 벗겨지고 나니 모든 게 흉물스럽다. 인간아!!) /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그냥 있어라. 그냥 입다물고 있어도 머리채가 절로 흔들리고만 귀염질은 아무나 하니??) /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심심할 때 받아도 협심증 걸릴 지경인데, 콱, 그냥 인간아, 대답도 하고 싶지 않어. 대답도...)

부부의 메모가 이리 돌아간다면 얼마나 삭막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얼마 전에 황혼 이혼이 대세라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그 황혼에 서로 등 기대어 훈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더는 못살아' 하면서 눈에 독기를 품고 이혼 도장 찍는다면 위의 답변도 과장된 것은 아니리라.

만약 데이트할 때, 노래 가사처럼 같은 질문을 한다면 과연 답이 이렇게 삭막하게 나올까. 아닐거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마음이 변했다는 거다. 찰떡같이 일가친척, 친구, 지인들이 모인 가운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로 사랑하며 어쩌구 저쩌구 약속하고 한 것이 다 헛거라는 거다.

그때 마음은 그때고... 이렇게 되는 거다.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마음만 변한 거다. 소주 제목(?)같이 `처음처럼'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이 생전에 딱 두 번 주례를 서셨다는데 그 주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로 덕을 보자는 마음으로 결혼하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손해볼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이 아내는 남편에게 덕을 보자고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덕을 보겠다고 하는 마음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베풀어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 하고나 결혼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 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고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골라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것을 고르게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결혼하는 순간부터 덕 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내가 그래도 저 분하고 살면서, 저 분이 나하고 살면서, 그래도 덕 좀 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줘야지 되지 않느냐' 이렇게만 생각하면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신혼부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부부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가 싶다.

다시 한번 노래 가사를 읽어본다.

유행가 가사라고 보면 그저 유치한 표현으로 비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날이 그 날같은 부부들에게는 돌나물처럼 파리한 사랑이 돋아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초보농사꾼에게 한 가지 묻고 싶다. `나를 만나 행복했냐고...' 나를 택함으로써 다른 여자를 택하지 못한 기회비용을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는지 말이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남편이 나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작은 축복으로 알았으면 좋겠다고..

이 험한 세상에, 그리고 단 한번의 인연으로 만나 이 가정을 꾸림에 있어 그 협력자로 나를 만난 것이 그나마 다행으로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이 봄에 우박이 쏟아진다. 날씨가 이럴수록 부부 사이에 장작불을 지펴야 하는데 오늘은 뜬금없이 `나를 만나 행복했냐'고 물으면 초보농사꾼은 어떤 대답을 할까...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냐고 하지 않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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