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읍에 다녀오다가 길가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계신 꾀골재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일단 차를 세워 할머니를 부르니 너무 반가워하십니다.

아무 연고도 없이 울진으로 온 산골가족을 늘 친 혈육처럼 이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우리 반 할머니... 길가에 죽 내놓은 짐을 차에 실으니 미안해 하십니다.

우리 집 꺾어지는 곳에서 내려 달라신다. 기름값 비싸다고... 들은 척도 안하고 댁까지 모셔다 드리니 입이 닳도록 고마워 하십니다.

어여 올라가시라고 해도 짐을 막 푸십니다. 아는 분이 농사지은 양파를 주셨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자꾸 꺼내주시려 그 많은 짐보따리를 다 풀어보십니다.

거절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감사히 받는 것이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길입니다.

잘 받아온 양파를 차에서 꺼내 계단에 두고 바라봅니다. 동글동글 할머니의 따사로운 얼굴이 을비칩니다.

오늘은 유독 하늘이 파랗습니다. 시인 천양희씨는 `6월은 소쩍새 우는 소리로 오는 것같다'고 했는데 귀도 그렇게 파랗게 물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맑아집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따라 다니는 수식어를 열거해 보라면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어른 무서운줄 모르고, 위 아래가 없고, 생각이 없고,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고, 나눌줄 모르고...

모두가 부정적인 말 일색입니다.

왜 그리 되었을까를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장 호르몬을 맞고 항생제를 들이 부어 기른 육류를 먹고 자란 세대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가족 제도가 붕괴되면서 기가 세어진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예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어린 손자까지 모두 한 집에 살았다는 점을 들먹입니다. 그런 까닭에 센 젊은 아이들의 기가 노인들에게 나누어지고 하여 기의 적정 배분이 이루어졌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핵가족이 되면서 노인들에게 분배될 드센 기가 남아돌아 아이들이 성급하고 폭력적으로 변한 것이라는 거지요.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풍족하다 보니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자라서 배고픔도 모르고, 참을성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탄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전에 다섯 손가락 정도 꼽는 거는 보통이고 거기다 조금 넉넉하다 싶으면 마저 다섯 손가락이 동원되는 정도의 자식을 낳았는데 지금은 달랑 하나 떨어뜨리다 보니 양보할줄도 모르는 ‘너 잘났다 세대’가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모두가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전에는 밥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먹기 힘든 세대가 우리네 부모 세대였지요. 그때는 가마솥에 밥을 지어 제일 먼저 그 집의 가장 밥을 먼저 펐습니다. 그리고 신주단지 모시듯 아랫 목에 묻어두고 나머지 식구들이 남은 밥을 퍼먹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앵무새처럼 말도 잘하는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집에 들어오는대로 퍼먹습니다. 어른, 애 순서도 없습니다.

늦은 저녁에 들어온 가장도 전기밥솥에 남아있는 밥을 퍼먹으면 그만입니다.

“인간이 지금이 몇 신데 밥도 못얻어 먹고 다니다 들어와 달그락거려”라는 소리 듣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러니 그 목숨과도 같이 여겼던 밥에 우선 아래, 위가 없어졌습니다.

옛말에 배부르고 등 따수우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지요. 밥 다음으로는 등이 따수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랫목은 항상 어른, 가장의 자리였습니다.

지금은 공부하는 애들이 상전입니다.

걔들이 밥먹으러 나오면 제일 편한 식탁의자를 내어주고, 걔들이 쉬려고 거실로 등장하면 쇼파를 내어줍니다.

“인간이 신문은 꼭 쇼파에서 봐야 하나. 애들 쉬려면 꼭 쇼파 차지하고 난리야.”소리 듣습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어른 지정석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른보다 늦게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래서 어둠이 깔리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마음조림과 어른의 눈치를 자연스레 먹으며 자랐습니다.

지금은 그 어른이 일로 지친 몸으로 새벽까지 차 안에서 자식 과외 끝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다 자식이 계단을 내려 오시면 잽싸게 차 문을 열고 나가 가방 받아들고 차문 열어 편안히 타시게 하는 풍경은 이제 이상하지 않습니다.

배고프다고 하기 전에 먹여 주고, 춥다고 하기 전에 따숩게 모시고 다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키운 것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집안에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애들이 상전이니까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 그림자로서도 아이들이 어려워 해야 하고, 그 가장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집안에 아버지의 자리가 없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들이대던 부정적인 눈초리를 우리 자신에게 조명해야 할 때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이슬을 먹고 자라지요. 어른들의 가치관과 언행을 먼저 조명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것이 어떤 것인지 깊이깊이, 안으로 안으로 반성하고 행동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인도의 스승 까비르는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마라. 그대 몸 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꽃잎을 안고 있다”고 하였지요.

과연 정신없이 돌아가는 이 시대 부모의 가슴이 정원으로 꽃이 만발한지... 그리하여 그 향기와 여운이 자식들에게 스폰지에 물 스미듯 그렇게 그들의 영혼에 스며들고 있는지...

오늘만이라도 바쁜 우리 부모들이 내 안의 정원, 내 마음의 풍경을 들여다 보면 좋을 것같습니다. 그리하여 부모의 그 마음의 평안이 아이들에게 전염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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