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 새인연이 된 접시꽃을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햇살이 비추면 세상이 죄다 보일 정도로 꽃잎이 투명하다.

한번에 피어재끼는 백합과는 달리 아래서부터 순차적으로 꽃을 피운다.

위의 꽃이 피면 아래 꽃은 쉽게 얘기해서 사라져준다.

즉 자리를 내어줄줄 안다는 거다.

그것도 꽃잎이 흩어져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정사정 없이 제 몸을 통째로 떨군다. 시간을 끌지 않는다.

인간사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자연은 당연한듯이 행한다.

그런 접시꽃에 빠져있는데 어느 집 담벼락에 핀 능소화를 보니 이건 접시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제 막 핀듯한 생생한 꽃이 통째로 떨어져 길바닥에 살아움직이고 있다.

섬뜩할 정도로...

쥔 것 놓을줄 모르고, 그것도 부족해 남이 쥔 것도 어떻게 하면 빼낼까 궁리하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를 일삼는 인간보다도 꽃이 더 터프하고, 때를 가릴줄 알며, 윗사람의 도리를 일깨워 주는 요즘이다.

 

산골로 귀농하고 햇수로 8년을 오두막에서 살았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15평도 안되는 오두막에 살게 된 것이다.

우리 가족은 오두막의 외형이나 불편한 구조 그리고 좁은 공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 오두막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사단이 난 것은 두 번이나 뱀이 마루까지 올라와 아는체를 하게 된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오래된 흙집이라 쥐가 들락거리며 내 살림살이를 참견하는 것까지는 봐줄만 했는데 뱀은 혐오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독사다 보니 위험천만이었다.

그런 이유로 오두막을 부수고 다시 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영화처럼...

그는 우리가 귀농한 이유와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 홈페이지를 통해 알게 되고 한두 번 만난 사람이었다.

그러다 집을 짓겠다고 하자 팔을 걷어 부친 사람이다.

우선 귀농하여 적응하느라 있는 돈을 다 날렸으니 집짓는 비용을 최소화하자며 집의 기초와 설비공사를 본인이 자원봉사해 주겠다는 거였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사양했다.

그는 집짓는 업자가 아니라 울진의 한수원에 근무하는 김승하라는 사람인데 '과연 주말에만 공사를 해서 일이 가능할까'와 '직장다니는 사람의 주말은 황금인데 어떻게 그것을 빼앗나' 하는 걱정 등이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는 대단했고 결국 집의 기초와 설비 공사는 김승하님이 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업자와 계약을 했다.

이제 집짓기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포크레인과 본인의 집을 손수 지을 때 사두었던 장비와 기계, 공구를 죄다 산골에 실어다 놓고 산골의 상하수도 공사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오두막을 부수는 일과 새 집의 기초공사와 설비공사를 주말과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해를 넘겨서까지 완벽하게 완성해 놓았다.

이 때, 완벽이란 내가 내 집을 지어도 그렇게 야무지고, 튼튼하고, 안전하게 짓지 못할 정도로, 건축업자도 혀를 내두를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카터기로 본인의 손가락 인대를 끊는 사고가 났지만 이 정도가지고 뭘 그러느냐며 오히려 걱정에 쩔어 있는 우리를 위로했다. 지금도 인대가 끊어졌던 손가락을 부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기초와 설비가 끝나자 그는 데크도 업자에게 맡기면 돈들어가니 자재만 사다가 초보농사꾼에게 둘이 만들자고 했다.

초보농사꾼이야 조수역할밖에 못하는 손재주였는데 집에 이어 데크도, 보일러실도 그렇게 하잔다.

산골에 눈이 쌓이면 자신의 포크레인으로 눈을 치워가며 추위를 옷삼아 데크와 보일러실 공사를 해주었다.

그 외에 장독대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새 집을 지으니 사람들이 묻는다.

돈이 얼마나 들었냐고 ...

그러면 우린 김승하씨 이야기를 한다. 아무도 안믿는다. 세상에 돈 한 푼 안받고 그런 사람이 어딨느냐고, 그것도 직장다니는 사람이 주말마다 와서...

침튀겨가며 설명을 해줘도 상대방의 못믿겠다는 표정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데는 늘 실패했다.

나 역시 다른 이에게 이런 내용을 들었다면 딱 한 문장으로 말을 끝냈을 것이다.

"아주 영화를 찍어라"고...

그러나 함석헌 옹의 '이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그 가슴 절절한 시가 절로 생각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에게 고마운 점 하나가 또 있다.

하루 공사가 끝나면 초보농사꾼에게 형님, 형님하면서 다음 공사를 의논하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그렇게 뭉클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다.

연고도 없는 이곳 울진, 무인도와 같은 곳에 뚝 떨어져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누가 피를 나눈 친동생처럼 이렇게 산골가족의 불편함을 헤아려주고 해결해 주려고 몸을 바치는지...

동냥은 못줄 망정 쪽박이나 깨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에게서 평생 배워도 못배우는 '인간학'을 배우고 있다.

그는 삭막하게 굳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풍경소리처럼 영혼을 들깨워주는 산교육자이다.

근대 최초의 구루라고 하는 라마 크리슈나는 "인생의 마지막 길은 반드시 홀로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홀로 걷는 주머니에 넣어가는 것은 바로 이런 친절과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는 날이다.

비가 온다. 그의 손때가 묻은 산골 여기저기에도 비가 내린다.

나는 과연 어떤 향기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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