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국을 강타한 구제역이 거의 끝나 가는가 싶더니 청정지역이었던 울진에도 번졌다. 연일 살처분하는 소와 돼지들을 지켜보며 축산 농가들은 물론 모든 군민들이 불안에 치를 떨고 있다,

울진군지 “災異” 편에 보면 괴질(怪疾)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물론 가축이 아닌 사람에 대한 온역(瘟疫)이지만 재앙이라는 점에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서기 1886년 丙戌 여름에 호열자(虎列刺)가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당시 淸나라에서 만연된 괴질이 갑신정변(1884) 이후 불안한 국내 정세를 타고 청일 양국이 주도권 쟁탈을 하는 과정에서 군인들에 의해 조선에까지 전염되어 국내를 휩쓴 것이다.

호열자는 ‘수인성 전염병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콜레라인데 감염되면 설사, 구토, 고열 등으로 신음하다 2시간 내지 36시간 내에 죽는 자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치사율이 60~70%를 넘었다는 공포의 이 괴질은 일가족이 떼죽음을 하기도 하고 온 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리기도 하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이었다.

1918년 丙午년 봄에는 독감이 크게 유행하여 울진에도 부락마다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는가 하면, 1946년 丙戌에도 8.15 해방의 기쁨 속에 중국 상해 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경로를 통해 조선에 괴질이 퍼졌다. 이 괴질은 특히 해안쪽으로 많이 번져 근남, 원남, 울진읍의 해안가 부락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1969년 늦여름에도 죽변에서부터 콜레라가 발생하여 울진읍 주변과 근남, 원남 등지에 크게 번진 기록들이 있다.

서양 의학이 도입되기 전 옛날에는 이러한 재앙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물론 제중원과 같은 국가차원의 의료기관을 통해 한약과 침 뜸 등으로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겠지만, 우선 이러한 재앙은 군주의 부덕(不德)으로 돌려 임금님이 명산이나 대찰에 나가 제사를 올리거나 기도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지방 관원들도 마찬가지여서 일정한 장소에서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올리는 정도였다.

따라서 관가의 주도하에 각 군현(郡縣)마다 좋은 장소에 제단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렸는데 이를 “려단(癘壇)”이라 하였다. 그리고 려역신(癘疫神)에 대하여 지방의 수령들이 매년 춘추(春秋) 2회에 걸쳐 제향을 올렸다.

울진군에도 울진읍 온양리 온곤동(蘊崑)에 1개소의 려단이 있었고, 평해군에도 성황단(城隍壇) 내에 1개소의 려단이 있었다고 전한다.

제사는 올리기 3일 전에 발고식(發告式)을 거행하고 제수(祭需)로는 콩죽과 밥(飯) 국(羹)을 올린다.

기원드리는 내용을 열거하면 ‘전쟁에 나가 죽는 것(戰死), 도둑 방지, 구타(毆打), 화재(火災), 수재(水災)의 예방, 굶어죽는 것(飢), 얼어죽는 것(寒), 역질(疫疾)의 예방, 무너져 깔리거나(頹壓) 벌레에 물리는 것(螫), 높은데서 떨어져 죽거나(墜死) 형벌을 받는 것(刑辟), 재물을 잃거나 궁핍하여 죽는 것(逼死), 자살(自殺), 처첩(妻妾)하는 행위 등을 막아달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지금도 울진읍 온양리 온곤동에는 려단터가 있어 주민들은 이곳을 ‘서낭’이라 부르며 매년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서낭터는 마을 서쪽 인근에 잡목과 시눌대가 숲을 이루고 숲속 중앙에 금기줄이 쳐진 큰 노송 세 그루가 있으며 노송 주위로 너댓 평 남짓한 평지가 조성되어있다.

온곤(蘊崑)동이란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나지막한 산으로 첩첩이 둘러 쌓여진 곳’이라는 지명 유래대로 얕은 산들은 북서쪽을 막아 겨울철과 거친 봄바람을 막아주고 남쪽으로는 계곡이 길게 트여 따뜻하고 온화한 남향마을이다.

온곤동에는 예전 2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고롱골과 합해 총 11가구가 살며 두 자연 부락이 합하여 매년 서낭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 올리기 5일 전인 정월 초 열흘 쯤에 서낭에 왼새끼로 꼰 금기줄을 치고 마을 우물을 청소하며 3명의 남자들로 제관을 선임한다. 제관은 부정한 일이 없는 남자로 마을 좌상이 동네회의를 소집하고 유사와 상의하여 뽑는다. 요즘은 마을에 남자있는 집이 드물어 제관을 뽑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제사는 밤 12시경 조용한 시간에 드리며 마을사람들의 왕래가 없도록 사전에 주의를 시키고 개들이 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다른 마을로 개를 이동시킨다.

요즘은 우물을 사용할 수 없어 상수도 물을 쓰고 남자들이 귀하다 보니 제관들의 수도 적을 수밖에 없지만 온곤동 마을 주민들의 정성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금년 정월 보름에도 서낭 제사는 이어지고 있다.

구제역이나 신종플러 같은 옛날에 몰랐던 신종 온역(瘟疫)의 엄청난 재앙을 보면서 이 모든 것들이 인간들의 죄악의 보응(報應)은 아닌가 반성해 본다. (2011. 2 증언/온양리 오흥순 76세. 울진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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