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면 구산리 마을에서 평해읍 월송리쪽 끝자락에 한국전통 건축물로 깔끔하게 단장된 운암서원(雲巖書院)이 있다.

현재의 운암서원 건물은 서기 1964년에 세운 것으로 본래는 「조선 순조(純祖) 26년(1826년) 온정면 반암동에 창건하여 백암(白岩)김제(金濟) 와 물제(勿齊) 손순효(孫舜孝) 양현을 배향하다가 순조 33년 (1833년)에 온정면 노은동(魯隱洞)으로 이건 하였다.

그 후 고종 5년( 1868년), 서원이 철원되어, 고종 15년(1878)에 유생들의 주창으로 현 구산리로 이건하고 백계(伯溪) 김희(金喜) 선생을 추배하여 매년 2월 중정일에 배향하고 있다.」고 안내판에 기록하고 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대원군은 1868년을 시작으로 1871년까지 “전국의 1,700여개의 서원중 사액서원 47개소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철폐하고 사당에 모신 위패를 묻어라”는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

본래 서원의 기능은 국가의 정책과 연계하고 당시 붕괴된 교학의 진흥과 사풍(士風)을 바로잡는 순기능의 역할이 컷기 때문에 선조 때부터 숙종 때까지 577개의 서원으로 크게 확대되었으나 결국은 순기능 보다는 역기능 쪽으로 변질되어 국가 정책에 큰 병폐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서원 별로 학파가 형성되고 붕당이 조성되었으며 군역의 회피와 탈세의 온상이 되었고 사람(士林)들의 여론 조성본거지가 되어 당쟁의 근거지로 작용하게 되니 흥선대원군은 집권 전부터 서원의 철폐를 결심하고 있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강력히 진행되자 전국 유림들의 반발이 매우 심하였지만 대원군은 그때마다 물러서지 않고 강제 진압함으로서 결국 전국의 서원들은 거의 철폐되었다.

전국적으로 서원이 확대되던 조선 중기에 울진에서도 서원 건립이 활발하여 1574년(선조 7) 울진현령 정구수가 앞장서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를 배향한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세우고 1628년(인조 6)에는 만휴당(萬休堂) 임유후(任有後)와 서파(西波) 오도일(吳道一)을 배향한 고산서원(孤山書院)이 건립되었다.

그 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한 옥계서원(玉溪書院) 및 몽천서원(蒙泉書院), 신계서원(新溪書院), 월계서원(月溪書院), 명계서원(明溪書院),노동서원(魯東書院)이 건립되어 울진군 전역에 유학이 크게 번성하였다.

백암(白岩)김제(金濟) 와 물제(勿齊) 손순효(孫舜孝) 양현을 배향하는 운암서원(雲巖書院)도 이때 건립되었다가 재건된 것이다.

-백암(白岩) 김제(金濟)는 고려 말 평해군수를 지낸 문신으로 선산(善山) 김씨이며 호는 백암(白巖)으로 성리학의 대가인 동시에 두문동 72현중 한분이다,

평해군수로 재직할 때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래와 같은 시를 한 수 남기고 배를 타고 동해바다로 사라졌다고 한다.

“동해의 저 배야 동쪽 노중련((魯仲連)의 나루터가 어디냐 / 오백년 고려조의 초개같은 이 신하 / 외로운 이 영혼 죽지 않고 있다면 / 붉은 해 따라가 중원 땅을 비추리”

-물제(勿齊) 손순효(孫舜孝)는 평해(平海) 손씨로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이다.
조선전기 문신으로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이래 형조참의까지 지내다가 한때는 좌천되어 야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다시 벼슬길에 올라 1478년 도승지가 되었고 이어 강원도관찰사를 거처 호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냈다.

1480년 지중추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우찬성까지 역임하였고 연로하여 사직하였다. 1497년 향년 71세를 향유한 분으로 울진 출신의 자랑스런 유학자이다.
-김희(金喜) 선생은 호가 백계(伯溪)로 임진왜란당시 비안현 의병장으로 상주 단밀에서 순절하니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추증되었다.

(출처:朝鮮王朝實錄,國朝人物考.朝鮮寰輿勝覽.울진군지.디지털문화대전.2011.4 김성준)

저작권자 © 울진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