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이라하면 우리는 흔히 돌을 깎아 만든 석비(石碑)를 연상한다. 울진군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지만 철을 녹여 만든 철비(鐵碑)도 4기가 있다.

울진군 북면 두천리 206-1번지에 있는 내성행상불망비각 내에는 1890년경(고종27년) 만들어진 2기의 철비가 있는데 두개의 규격이 약간씩 다르나 대체로 높이 94cm, 폭 25cm, 두께 2.2cm 로 양각되어있다.

이 철비들은 선질꾼들의 안전한 상행위를 위해 도와준, 당시 봉화 내성(乃城)에 살고 있던 접장 정한조(鄭韓祚)와 반수(班首)인 안동사람 권재만(權在萬)에 대해 그 은공을 기리기 위하여 보부상들이 세운 비이다. 이 철비는 1995년 6월30일 문화재자료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보부상단들은 불망비를 세우고 12령을 왕래하면서 반드시 술과 과일을 놓고 예를 올렸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대동아 전쟁 때 전쟁 물자가 부족하자 남의 집 대문은 물론 사찰의 종(鐘)까지 빼앗아 갔는데 내성행상불망비도 철비였기 때문에 무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철비를 몰래 땅에 파묻어 버렸다. 다행히 일본인들은 찾아 내지 못하여 이 비석은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해방 후에 주민들이 다시 파내어 찾아 내였다.

그 후 울진군에서 예산을 들여 비각을 짓고 철저하게 보관해 오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부식방지를 위한 장치도 마련하였다고 한다. 철비가 있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도 철이 생산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신 울진군지에 “하당(下塘) 중당(中塘) 지역에 철광산과 용광로가 있어 석비보다 제작이 쉬웠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기록이 있어 울진 지역에도 철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1C 때부터 신라가 울진 삼척 지역을 침공하여 505년에 완전히 강릉 이남지역이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혹자는 신라가 울진 삼척지역을 끊임없이 공략해 온 이유로 철의 생산을 들고 있다. 울진 삼척지역이 옛 부터 철이 생산 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철비는 조선후기에 우리나라 전역에서 한때 유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무엇 이었을까?

첫째, 당시 사람들은 철은 돌보다 훨씬 단단하기 때문에 파손되지 않는다고 보았을 것이다.

둘째, 철비는 만들기가 쉬웠을 것이다. 큰 암석을 깨내어 자르고 다듬고 글씨를 새기고 연마하는 돌 비석의 작업공정보다 금형틀을 만들어 찍어내는 작업이 훨씬 쉬웠고 따라서 경비도 적게 들었을 것이다.

셋째, 철비는 석비에 비하여 가볍고 간단하여 운반이 용이하다는 점이다. 부피가 적고 가벼워 원거리나 경사진 곳에도 운반하기 쉬웠을 것이다.

이러한 이점으로 철이 생산되는 곳이라면 누구나 철비를 선호했을 것으로 보인다. 울진에는 철광산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철비의 제작이 한때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울진군지(신) 울진문화유적바로알기. 사향1호. 삼척문화바로알기/삼척시립박물관)

비     명

재 임 기 간

입 비 시 기

규        격

현 재 장 소

관찰사 홍우순
청덕애휼 영세비

1850년2월
~1853년 8월

1852.11월
(철종3년)

높이 117cm. 너비33cm.
두께 3.5cm

봉평리신라비
전시관에 전시

현령 심해
유애 선정비

1850년2월
~1853년 8월

1852.11월
(철종3년)

높이 117cm. 너비33cm.
두께 3.5cm

봉평리신라비
전시관에 전시

내성행상 반수
권재만 불망비

1890년경
(고종27)

 

높이 94.5cm. 너비 24.8cm.
두께 2.1cm

북면
두천1리 소재

내성행상 접장
정한조 불망비

1890년경
(고종27)

 

높이 93.3cm. 너비 23.1cm.
두께 2.2cm.

북면
두천1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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