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다니며 재잘거리는 새소리를 듣고 잠시 입에서 ‘봄’이라는 말이 개구리 튀어나오듯 나올뻔 했다. 눈을 더 멀리로 들면 산이 눈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생각은 그렇게 자유방임주의다.

그렇게 들을 거닐다 집으로 들어오니 햇살이 있는대로 통창으로 쏟아져 들어와 거실에 엎드려 졸고 있다.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기둥에 걸린 겨울씨레기처럼 만지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만 같다. 그들이 깨어 달아날까봐 난 깨금발로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들이 깨어 달아나면 나만 절단이다. 그렇게 햇살이 오래 엎드려 있게 두어야 내 영혼도 열을 받아 생각이 경직되지 않고 노골노골해진다.

그러다 햇살이 쪽잠을 다 자고 깨어 달아나면 마음도 굳어지고, 몸도 어린 시절 먹던 쫀드기처럼 벌써 쫀득해진다. 햇살은 사람의 마음까지 좌지우지하는 마력이 있다.

사람 빼고 자연의 모든 것이 이런 뿅가는 마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섣불리 촐삭거리지 않게 된 점 또한 나에게는 예삿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내가 이 산중에서도 조금도 외롭지 않다고 하면 입은 나를 봐서 “그래요.”하는 말을 내보내지만 눈은 ‘설마’하는 빛이 역력하고 귀는 금새 빳빳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깊은 오지 산중에서 대부분의 날은 신문을 가져다 주시는 우체부 아저씨가 만나는 사람의 다 인 날이 많은 산골아낙이 그따위 소리를 하니 그럴만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이 옆에서 치근덕거려야 외롭지 않은줄 안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야 하지만 너무 삶 전체가 다른 여백 없이 사람 속에서만 뽂닦거리면 영혼이 종잇장처럼 얇아진다. 영혼이 얇아지면 작은 일에 멍이 들고 작은 충격에도 살얼음깨지듯 금이 가 재생이 어려워진다. 산속에서 외롭지 않은 이유는 여럿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나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도 철따라 모습을 바꾸며 벗이 되어 주고 교훈을 준다. 시냇물도 정신없이 잴잴거리며 내게 귀의 덕갱이를 씻어내라고 끊임없이 알려주지만 한겨울에는 제 소리를 단속하기 위해 얼음이불, 눈이불을 덮어 쓰고 내 귀에 안식을 준다.

흙 또한 봄이면 지랄탄을 터뜨린 것처럼 여기 저기서 김을 뿜어 올리며 언 몸을 풀고 활동에 들어가지만 겨울이면 자신을 단련하는 시기로 얼음장같은 침묵의 시간을 가지며 생각있는 산골아낙이라면 교훈으로 알겠지 하고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한다.

바람은 또 어떤가. 바람은 자기 입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벗들을 통해 드러낸다.

풍경의 흔들림을 통해, 긴 줄기에 다닥다닥 붙은 접시꽃의 흔들림을 통해, 정도가 좀 심하면 산중의 온갖 세간살이들을 들판으로 휘젓는 것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자신을 입으로 침튀기며 알리려 하고, 당장 오해를 풀려 달려드는 요즘 우리네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다.

이렇듯 모든 것들이 산속의 우리 네 식구 하나 교육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들은 스파르타식으로 나를 닦달하여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들 각자는 단과 학원 선생이지만 때가 되면 합동으로 강의하는 종합반 선생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날로 먹는 수업같지만 혹독한 과정이 남아 있다. 침묵으로 시간을 벌면서 기다림으로 산골가족을 교육시킨다.

그런 교육에는 실패란 없다. 교육 패턴이나 방침도 우리 아이들의 교육현실처럼 뻑하면 기분내키는 대로 바꿔치우는 것이 아니다.

늘 그 패턴이지만 지루함이 없고 교육효과는 두 말 하면 입 아프다. 이런 이들과 함께 하는데 외롭긴... 다만 외로울 때가 있다. 그것은 자연에게 내가 ‘외로움’ 과목을 수강할 때다.

그때는 처절하게, 몸서리치게 외롭도록 가르친다.

그런 시간을 거쳐야 영혼이 맑아진다는 것을 귀농 밥을 고봉으로 먹고 나서야 알았다. 그 수강시간 말고는 그럴 새가 없다. 요즘은 ‘침묵수업’중이다. 즉 ‘어둠의 시간’이다.

이 수업은 고학년이 되어야 수강하도록 되어 있다. 자연의 커리큘럼은 조금의 오차도 없고, 완벽하다. 이제 귀농 12년차라 고학년의 대열에 끼었고, 지금은 그 과목을 수강중이다.

요즘 사람들은 입으로 다 하려든다. 하다못해 립서비스라는 말까지 있다. 얼굴빛 하나 안 바꾸고 자신을 칭찬하는 일에 열을 올린다. 오해가 생기면 묵상하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당장 얼굴 맞대고 말로 다 침튀겨가며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즉석에서 따져대야 직성이 풀린다.

그 침 튀김의 방향은 우선 나를 향해 조준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진실’은 ‘세월’을 먹이로 한다. 콩깍지 까듯 금방 까발릴 수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오죽이야 좋으련만 그렇지가 않다. 금방 이빨 사이로 침튀기며 다 밝힐 것같으면 무엇 때문에 침묵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할까.

요즘 자연에서 배우는 ‘침묵수업’은 가혹하다. 아무리 천불나는 일이라도 들숨, 날숨을 느끼며 한 박자 쉬어보란다. 아무리 눈 뒤집히는 일이라도 말을 아끼며 스스로 진화하라 가르친다. 처음엔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이라고 여겼지만 하루하루 자연의 도움을 받아 연습해보니 자연의 깊은 뜻을 알겠다.

이 수업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몇 년 후에 학점을 이수할지 모른다. ‘철들자 노망’이라고 이거 학점 이수하자 채머리 흔드는 것은 아닌지... 그것은 신만 아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나의 인간됨에 달렸으니 장기전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연필을 깎고, 지우개를 준비하고 공책을 펴놓고 오늘도 수업준비중이다. 그 공책 위로 겨울 새 한 마리가 제 몸이랑 똑같은 검은 무늬를 새겼다가 금새 걷어가지고 간다.

지금은 쉬는 시간......

저작권자 © 울진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