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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읍 오곡1리 연당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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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포사나이
등록일
2006-07-26 14:00:20
조회수
3065
첨부파일
 오곡연당정1.jpg (883160 Byte)
▣울진군 평해읍 오곡1리 연당정
▣ 아계유고<鵝溪遺稿>의 저자 이산해(李山海)는?
이산해는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자는 여수(汝受)이고. 호는 아계(鵝溪).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1년(명종16년) 문과에 급제. 부제학 .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처 52세에 영의정에 올랐으나. 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성룡과 함께 서수론(西狩論)을 주장하여 어가가 의주로 몽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이 일로 개성에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평양에 가서 다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당시 강원도 평해(平海)에 귀양을 오게 된다. 이때가 그의 나이54세였다.
평해 에서의 유배생활 3년은 이산해에게 있어 문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시기였다고 역사가들은 평하는데. 그의 저서인 아계유고(鵝溪遺稿)에 실려 있는 시 840수 가운데 절반이 넘는 483수가 이 기간에 지어진 것이거니와, “그의 시는, 초년에 당시(唐詩)를 배웠고 만년에 평해로 귀양가 있으면서 조예가 극도로 깊어졌다.” 허균(許筠)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다.
57세 때 사면된 그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61세 때는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탄핵을 받고 이듬해에 모든 공직을 사퇴. 충남(忠南) 신창(新昌) 시전촌(枾田村)으로 내려가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그 후 선조가 승하하자, 그는 70세의 고령임에도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지문(誌文)을 짓고, 국정을 정권의 이양을 무사히 마무리 하였다.
광해군 원년인 1609년 평소 장래가 촉망되던 둘째 손자 구(久)가 요서(夭逝)하자 이에 총격을 받아 지병이 악화, 서울 장통방(長通坊)에서 71세의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아계유고 제3권에 기성록(箕城綠) 잡저(雜著) 달촌기(達村記). 정명촌기(正明村記). 울릉도설(鬱陵島說). 사동기(沙銅記). 오곡연당기(梧谷蓮塘記). 팔선대기(八仙臺記). 응암기(鷹巖記). 황보촌기(黃保村記). 마암기(馬巖記). 우암기(牛巖記). 다천기(茶川記). 해월헌기(海月軒記). 안당장전(安堂長傳). 안효자전(安孝子傳). 안주부전(安主簿傳). 월송정기(越松亭記). 곡두기(鵠頭記). 해빈단호기(海濱蜑戶記). 망양정기(望洋亭記). 서촌기(西村記). 증옥보상인서(贈玉寶上人序). 유수진사기(遊修眞寺記). 유광흥사기(遊廣興寺記). 유선암사기(遊仙巖寺記). 유백암사기(遊白巖寺記). 김원성전(金原城傳). 죽봉기(竹棚記). 순리전(循吏傳). 기성풍토기(箕城風土記). 현제 위치는 울진군 기성면 황보에 이산해(李山海)유배지다.
◎오곡연당기(梧谷蓮塘記)
내가 어릴 적부터 외물(外物)에 대해서 별로 기호(嗜好)가 없었으나 오직 연(蓮)만은 병적일 만큼 좋아했다. 이 때문에 남의 집에 연꽃이 만개했다는 말을 든는 날이면 천리 길도 멀다 않고 말을 타고 가서 구경했으며. 집에는 늘 함지로 작은 못은 만들어 홍련(紅蓮)과 백련(白蓮) 및 뿌리를 심어두고 구경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곳 기성(箕城)으로 오고부터는 오두막이 너무 비좁고 사방에 빈 땅이 없어 마치 토굴 속에 갇혀 지내는 꼴이 되었으므로 비록 화훼(花卉)를 완상하고야 싶지만 뜻대로 안 되었은즉. 예전에 보던 연의 그 푸른 잎과 붉은 꽃망울이 마음속에 아른거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군(郡)[평해(平海)]에는 북쪽으로 4. 5리쯤 떨어진 곳에 오곡(梧谷)이란 곳이 있고 오곡에 못이 있는데 연꽃이 매우 만개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하루는 이웃 노인을 데리고 그곳으로 갔더니. 천 줄기 연이 묶어세운 듯이 대궁 이를 뽑아 올려 수면 위로 말끔한 모습을 드러낸 채 붉은 꽃 푸른 잎이 어우러져 있었다. 이 광경을 보니. 마치 천리 밖에서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갑기 그지없었다. 때마침 산에는 비가 막 그치고 물기 머금은 구름장이 아직 걷히지 않았는데 아침 햇빛은 화살처럼 내려와 꽂히고 나무에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옥쟁반 같은 연잎 위에 다투어 쏟아지고 있었다. 또 물방울을 받치고 있던 연잎은 차례로 기울어져 물방울을 쏟기를 그치지 않고 붉은 단장을 한 채 물기에 함초롬히 젖은 꽃잎은 필듯 말듯 반개하여. 맑은 향기가 그윽하게 두건과 소매. 지팡이와 신발에 스미어. 사람으로 하여금 못내 서성이면서 날이 저물도록 떠나지 못하게 했다.
아아. 연꽃의 향기와 덕에 관해서는 주염계의 애련설(愛蓮說)에 상세히 말해 놓았으니. 내가 감히 무슨 말을 덧붙이리요. 다만 이 연이라는 것은 관청이나 빈관(賓館)의 뜰에 자리지 않고 산야의 적막한 물가에 뿌리를 두고서. 잎이 커지면 절로 시들고 꽃이 고와지면 절로 떨어지며. 향기가 맑아도 맡아주는 사람이 없고 열매가 달아도 따먹는 사람이 없으니. 군자로서 세상에 숨어 사는 이가 아니겠는가. 바람이 불면 춤을 추고 빗줄기가 때리면 소리를 내어 한가로이 마치 스스로 즐기는 듯하니.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번민하지 않는 이가 아니겠는가. 나는 세상에 숨어 사는 이가 아니라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이니. 비록 볼 만한 향기와 덕은 없지만 끝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은 저 연꽃과 자못 비슷하다. 이런 까닭에 내가 참으로 감개(感慨)하여 슬퍼하는 것이다.
못은 6. 7이랑 크기에 가운데는 섬이 있고 곁에는 둑이 잇는데 모두 흙으로 쌓아 솔. 버들. 모과 등의 나무를 심어 놓았다. 둑을 쌓은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연을 심은 사람은 군의 아전으로서 성(姓)이 손씨(孫氏)라 한다. 이로써 기(記)를 삼노라. 후포역사연구회 부회장 신 진 철
작성일:2006-07-26 14:00:20 221.142.76.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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